제주도의 효수대(梟首臺)- 어느 정보요원의 긴 생애 짧은 이야기 3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2/15
제주도의 효수대(梟首臺)- 어느 정보요원의 긴 생애 짧은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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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는 일종의 덩케르크 철수였다고 얘기했다. 즉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혔던 것이다. 그 포위망 안에 중공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UN군을 뚫고 중공군 포위망을 넘어 ‘의거귀순’하기는 불가능했다. 공산군이 다시 들어오면 죽는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흥남부두에 몰린 피난민 전부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쪽의 군경도 그 점을 주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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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피난민은 2백만이 넘었다고 하고, 전쟁 이후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만 60만은 될 것이다. 이 피난민의 홍수는 남한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그들을 수용하고 먹이는 일도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북한의 ‘제 5열’이 투입되기에는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1951년 2월경에는 피난민을 가장하여 공작을 펼치자가 검거된 ‘제 5열’이 8백명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1951년 2월 1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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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피난민들 . 한국 구세군 , 연합통신 이미지
‘빨갱이 색출 작업’에 스카우트된 나는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군복을 입고 장교가 시키는 일에 나섰다. 국군 장교는 나를 다목적으로 활용했다. 내가 살았던 지역 사람들, 기독교인들을 주로 면담시켰고, 내가 아는 지역 정보와 상식 등과 어긋나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또 나이가 어린지라 상대방이 상대적으로 방심하고 편히 말을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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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잡아내는 데에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빨갱이’를 잡아내지는 못했겠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표정이든 말투든 들여다보였고 걸러낼 수 있었다. 후일 직업이 될 정보 장교의 떡잎이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교회 나가셨다고 했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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