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렴 가문의 한글편지 (1) : 조정에 나가면 '쓰리송'의 일환이지만, 노비에게는 호구였던 건에 대하여

박영서
박영서 인증된 계정 · 울고 웃는 조선사 유니버스
2023/04/03


송규렴이 살던 집, 제월당(霽月堂) (문화재청)
17세기의 조선에는 ‘쓰리송’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정치철학의 대결이 치열했었는데요. 기호학파의 중심으로서 그 논의를 주도한 은진 송씨 3인방, 송시열(宋時烈, 1607~1689)·송준길(宋浚吉, 1606~1672)·송규렴(宋奎濂, 1630~1709)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중 송규렴은 관료로서 승문원(承文院) 부임으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고, 훗날 극소수의 엘리트 관료만이 받을 수 있던 기로소(耆老所, 나라에 공이 많은 연로한 신하들의 명예 기구)에 드는 영예도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이조판서 송상기(宋相琦)라는 든든한 아들을 두었고, 송시열처럼 사약으로 생애를 마감하지도 않았으니, 조선의 모든 사대부와 관료가 꿈꿨던 이상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 송규렴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이렇게 평합니다.
   
“공은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며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다. 평생 과격한 말이나 심한 비평을 하지 않았다. 특히, 모두가 이름을 날리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오직 공만이 40세가 되기도 전에 물러나 은둔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공이 다시 나오기만을 바라였다.”
   
- 『도곡집(陶谷集)』 「예조 판서 송공 시장〔禮曹判書宋公諡狀〕」
   
사람됨이 태연하고 차분했으며, 물러나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는 적었다.
   
- 『숙종실록(肅宗實錄)』 1709년 6월 4일 
   
아무래도 그의 성격은 ‘점잖은 양반 그 잡채’였나 봅니다. 행장과 실록에 적힌 그의 졸기(卒記)에서 모두 입을 모아 그의 너그러운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한번 결심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결기까지 있으니, 과연 한때 정국을 주도했던 이름난 사대부라 할만합니다.
   
그런데 그 ‘잘 나가는’ 엘리트 관료가 남긴 한글편지에는 무언가 언밸런스한 면도 있습니다. 때는 신분제 사회, 게다가 그의 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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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를 유영하는 역사교양서 작가, 박영서입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썼으며, 딴지일보에서 2016년부터 역사, 문화재, 불교, 축구 관련 기사를 써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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