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
울고 웃는 조선사 유니버스
조선사를 유영하는 역사교양서 작가, 박영서입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썼으며, 딴지일보에서 2016년부터 역사, 문화재, 불교, 축구 관련 기사를 써오고 있습니다.
심노숭의 짠내나는 유배 생활 (3) : “달이 뜨면 저는 아버지를 부르겠어요.”
심노숭의 짠내나는 유배 생활 (3) : “달이 뜨면 저는 아버지를 부르겠어요.”
심노숭은 노론 시파의 스피커였던 심낙수(沈樂洙, 1739~1799)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우로는 심노숭의 동생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심노암(沈魯巖, 1766~?)이 있었죠. 또한, 1777년 16세의 나이로 전주 이씨를 맞이하는데요. 전주 이씨는 고생만 하다가 1792년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돌아갑니다. 그녀와 심노숭 사이에 있던 1남 3녀 또한 둘째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죠. 유배를 가던 시점에서 평생의 벗 심노암과 하나밖에 없는 둘째 딸은 심노숭의 모든 것이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키고 싶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의 생이별은 유배객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이지요. 심노숭은 억울하게 유배를 간다는 점에서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처했지만, 딸 아이를 혼자 두고 간다는 생각에 이르면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배를 떠나는 길에서도 딸이 건넨 작별 인사는 그를 자꾸만 눈물 젖게 하였지요. 1801년 3월 4일 - 『남천일록(南遷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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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잃은 아이를 위한 정조의 솔루션, 『자휼전칙』
심노숭의 짠내나는 유배 생활 (2) : 노비 say “답답해서 내가 번다!”
시대에 뒤처지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
심노숭의 짠내나는 유배 일기 (1) : “이러려고 양반 했는지 자괴감이 와”, 유배지에서의 인원 체크
심노숭의 짠내나는 유배 일기 (1) : “이러려고 양반 했는지 자괴감이 와”, 유배지에서의 인원 체크
어쩌면 자존심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무언가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론 엄청난 돈을, 크나큰 명예를, 그리고 그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죠. 그리고 어쩌면 또, 그 자존심이라는 모호한 글자 속에는 ‘옳은 것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 또한 들어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옳음이라는 가치를 먹고 사는 조선의 지식인, 사대부들에게 자존심에 대한 문제는 중대한 실존적 문제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런 양반의 자존심이 팍팍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배인데요. 한때 슈퍼 루키라 불리는 양반일지라도, 한때 서울의 명문 가문 중 하나라 불리던 가문의 후손일지라도, 때가 달라지고 빽이 없어지면 초라한 남색의 알거지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도 빈부격차가 있듯, ‘유배씬’에서도 돈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마법의 열쇠였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양반은 ‘지지리 궁상 프리미엄’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붙어나갈 수밖에 없었습...
이문건의 일기, 조선 가정사를 담다. (2) : 이문건의 '금쪽같은 내 새끼'
이문건의 일기, 조선 가정사를 담다. (2) : 이문건의 '금쪽같은 내 새끼'
조선 사대부의 지상과제는 ‘과거 합격’이었습니다. 과거 합격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과거 합격만이 자신과 가족의 윤택한 삶을 허락했으니까요. 특히, 이문건처럼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는 사대부는 더욱 후손들의 과거 합격에 목을 맸죠. 자신은 틀렸으니, 아들이라도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래서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향해가던 이문건은 대를 이을 자손의 건강한 삶과 자녀 교육을 남은 인생의 과제로 삼아서 전력을 다하는데요. 그런 이문건이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습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대를 이을 손자의 출생이었지요. 1551년 1월 5일 - 『묵재일기(默齋日記)』 · 『양아록(養兒錄)』
며느리가 아침부터 배가 아프고 점점 산통이 심해지더니, 오전 8시경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이든 아내와 여종 돌금이가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줬다. 마음씨가 착한 돌금이는 나의 맏손녀 숙희를 정성스레 잘 돌봐주어서, 손자의 보모도 맡겼다. 갓 태어난...
이문건의 일기, 조선 가정사를 담다. (1) : 이문건-김돈이의 ‘부부의 세계’
이문건의 일기, 조선 가정사를 담다. (1) : 이문건-김돈이의 ‘부부의 세계’
고등학생 때 야자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요. 그때 부부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도대체 왜 싸우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싸우려면 우리 없는 데서 싸우든가.’라는 이야기로 합의했죠. 세월이 흘러 그 친구들도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역시 부부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조선에도 부부 싸움이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싸웠을까요?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사료가 있습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입니다. 이문건은 일기를 쓰면서 먹고 사는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기록했는데요. 조선전기,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섬뜩한 조선의 부부 싸움 또한 이 일기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이문건은 중종 재위기에 관직 탄탄대로를 걷던 사대부입니다. 그런데 그의 족친인 이휘(李輝)가 조작된 증거로 역모에 걸렸으니, 바로 을사사...
송규렴 가문의 한글편지 (2) : 밖에서는 근엄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한 차가운 대전의 남자
송규렴 가문의 한글편지 (2) : 밖에서는 근엄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한 차가운 대전의 남자
킹갓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은 불교계와 사대부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한문이 표준 문자로 쓰이던 시대였고, 한글은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으로 속된 글자라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내 가족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남성들 또한 한글을 배울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데요. 16세기를 거쳐 17세기 이후에는 송시열이나 송규렴과 같은 당대 유학자들의 샤라웃을 받던 유학자들조차도 가족들,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를 상대로는 한글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물론, 정조와 같은 왕들 또한 그러했죠. 무엇보다, 구어체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글편지는 살아있는 말의 묶음이며,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특히, 한글편지에는 한문 편지에서는 좀처럼 파악하기 힘든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딸아이를 염려하는 아빠의 편지를 읽어보시죠. 네 효천증(哮喘症, 천식)이 조금 나았다고 하니, 정말 기쁘구나...
송규렴 가문의 한글편지 (1) : 조정에 나가면 '쓰리송'의 일환이지만, 노비에게는 호구였던 건에 대하여
송규렴 가문의 한글편지 (1) : 조정에 나가면 '쓰리송'의 일환이지만, 노비에게는 호구였던 건에 대하여
17세기의 조선에는 ‘쓰리송’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정치철학의 대결이 치열했었는데요. 기호학파의 중심으로서 그 논의를 주도한 은진 송씨 3인방, 송시열(宋時烈, 1607~1689)·송준길(宋浚吉, 1606~1672)·송규렴(宋奎濂, 1630~1709)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중 송규렴은 관료로서 승문원(承文院) 부임으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고, 훗날 극소수의 엘리트 관료만이 받을 수 있던 기로소(耆老所, 나라에 공이 많은 연로한 신하들의 명예 기구)에 드는 영예도 거머쥐었습니다. 그는 이조판서 송상기(宋相琦)라는 든든한 아들을 두었고, 송시열처럼 사약으로 생애를 마감하지도 않았으니, 조선의 모든 사대부와 관료가 꿈꿨던 이상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런 송규렴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이렇게 평합니다. “공은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하며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다. 평생 과격한 말이나 심한 비평을 하지 않았다. 특히, 모두...
클린스만호, 자유로운 공격축구의 빛과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