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걸 신화"를 돌아보다

이 글은 코로나19와 백신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백신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질병관리청-코로나19예방접종 공식 홈페이지
2021년도 슬슬 끝나가는 가운데, 올 한 해의 여러 사건들을 돌이켜볼 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케이팝에서도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있었던 ‘올해의 사건’ 후보감이라면 역시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 역주행이 아니었을까 한데요. 이번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역주행 신화를 새로 쓰며 사회 문화 현상 수준까지 올라왔던 ‘쁘걸 신화’에 대하여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선 브레이브걸스에 대한 기초적 사실을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브레이브걸스는 2011년 유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용감한형제' 산하의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지금의 '브레이브걸스'는 아니었죠. 2016년에 브레이브걸스는 2기가 시작되며 멤버를 대대적으로 교체합니다. 2017년에 1기 원년 멤버가 모두 탈퇴하고, 전원 신규 5인 체제가 본격화되는데 바로 이때 나왔던 노래가 '롤린'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수많은 그룹이 데뷔하고 잊혀지는 치열한 아이돌 시장에서 브레이브걸스의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2018년에는 5인 멤버 중 한 명이 추가로 탈퇴하고, 2020년에 '운전만 해'로 다시 복귀했지만 역시 성적은 좋지 못했죠. 그렇게 2021년에 활동 종료와 해체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터진 것이 롤린 역주행이었고요.

자, 그렇다면 롤린은 왜 '터진' 것일까요? 코로나 시국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역전극 신화.... 밝게 웃는 미소의 힘... 뭐 이런 것들이 꼽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춤과 음악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그 신화를 쓰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주행 곡이 유행할 때 늘 나오는 말입니다만, 전국적으로 모두가 롤리롤리롤리~를 하고 있을 때 "이게 왜 그 때는 안 떴지?"라는 질문도 생길 수밖에 없죠.

사실 어쩌면 그 질문이 롤린 신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일 수가 있습니다. "2017년엔 안 떴다가 2021년에 갑자기 떴다는 것".

롤린이 한참 역주행을 할 때 전에 K-POP을 주제로 아는 분들과 떠드는 모임에서 술을 먹다가, 롤린을 완벽하게 정의하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거 MB팝이죠. 스타일이 완전 그 시대에요."

아 정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이명박 시대는 아이돌, 특히 걸그룹 2세대의 전성기였습니다. 14년에 레드벨벳, 15년에 트와이스, 16년에 블랙핑크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3세대가 시작되니까, 뒤로 늘려 잡아도 14년도까지를 보통 2세대로 잡곤 하죠. 그렇다면 이때 스타일들은 어땠나 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OsSlxBluwc0
https://www.youtube.com/watch?v=q6f-LLM1H6U&t=138s

노래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들으면 "아 이거!" 할만한 유명한 곡들입니다. 두 곡 모두 용감한형제 작사 작곡인데, 사실 이때는 정말 용형이 히트곡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뽑던 시절이기도 했죠. 그리고 저 두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걸그룹 노래의 특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노래가 전반적으로 '뽕끼'가 넘친다
2. 남성향 섹시 컨셉이 상당하다

롤린이라는 노래는 이 두 특성에 완벽히 부합합니다. "기다리고 있어요~" 하면서 내지를 때 롤린의 구수한 뽕끼는 거의 절정에 달하죠. 게다가, 섹시한 의상과 앨범 자켓에 더해서 의자춤까지, 10년 전에 유행했을 섹시 컨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공교롭게도 의자춤의 대명사 손담비의 "미쳤어"도 용감한형제의 곡이군요....

이렇게 보면 2017년에 이 노래가 뜨지 못했던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2015년을 2-3세대 전환기라고 했을 때, 2017년 시점에서 저 컨셉은 "뭔가 한물 간" 컨셉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뽕끼를 '내지르는' 음악들은 세련된 비트와 풍성한 사운드 위주의 음악으로, 사실상 같은 케이팝이라고 봐줄 수 없는 수준으로 변화했습니다.
https://youtu.be/J0h8-OTC38I

같은 17년도에 나왔던, 언제나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SM의 레드벨벳만 보아도 그렇고


https://www.youtube.com/watch?v=XznW8Ti6WWk

제가 요즘 가장 열심히 파고 있는 그룹은 "이달의 소녀"의 전설적 명곡 LOONATIC을 들으며 대체 케이팝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건가 귀를 의심하던 시절입니다.

섹시 컨셉과 안무도 마찬가지입니다. AOA와 걸스데이가 섹시컨셉의 황혼을 장식하면서 섹시 컨셉 경쟁은 계속해서 누가 더 성적 대상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느냐의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텔라 같은 그룹이 나왔을 때는 대중적 차원에서도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반감을 불러내기까지 했죠. 이 시기가 대략 15년에서 16년입니다.

그렇게 트렌드가 바뀌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세대의 걸그룹이 선택한 방향성은, 트와이스처럼 '귀엽게' 가거나, 아니면 블랙핑크처럼 '걸크러쉬'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f(x)가 닦은 길을 따라 레드벨벳이나 이달의 소녀처럼 파인아트적 요소를 첨가해서 난해하고 마니악하게 가는 방향성도 있었죠. 새로운 방향성 중 무엇이 정답이었던 간에, 어쨌든 이제 남성향의 섹시 컨셉의 시대는 가고, 점점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거나, 혹은 여성을 향한 어필을 뽐내는 걸그룹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고 있었다는 건 너무나 명확해졌습니다. 2017년 시점에서는 말이죠.

이렇게 귀엽게 가거나
이런 걸크러쉬로 가거나.. 물론 블랙핑크의 걸크러쉬가 터지는 것은 2018년 뚜두뚜두부터입니다만

아니면 아예 이 방향성으로 가거나...


위 사진은 2017년 당시 롤린 커버입니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맨 위의 롤린 커버는 2021년에 그들이 역주행으로 인기를 얻은 뒤에야, "너무 구리다"는 이유로 교체되었죠. 2017년 브레이브 걸스의 컨셉이 전반적으로 하여간 당시 트렌드와는 별로 안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 아닐까 하네요.

자, 그러면 이렇게 '시대착오적'이었던 롤린은, 그 시대가 4년이나 더 흐른 2021년 시점에서 대체 어떻게 역주행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우선 첫번째, 일단 그들은 대중적 잠재력을 계속 보유하고는 있었습니다. 다소 특이하게도, 군대라는 집단을 통해서 말이죠. 메이저로 뜨지는 못했지만, 방송에는 계속 나올 수 있던 니치의 그룹들이 주로 군대 행사를 많이 도는데, 섹시 컨셉을 바탕으로 이해하기 쉬운 곡들을 불러주는 브레이브 걸스는 언제나 '군통령'으로 환영 받아왔습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역주행의 밑바탕이 형성되었던 것이고, 실제 그들의 역주행 신화도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시작되죠.

그런데 당시 경험을 공유하는 군필자를 넘어 전국민적인 신화로 이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등장합니다. 바로 "2017년보다 오히려 2021년이 롤린이 뜨기 좋았다"는 것입니다. 아리송할 수도 있겠습니다. 2021년은, 롤린 신화 이후이긴 하지만 에스파의 Next Level과 Savage 같은 하이퍼팝들이 떴을 정도로 케이팝 시장이 한층 더 난해(?)해진 해기도 했고, 남성향 섹시 컨셉은 2017년 당시보다도 더 시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20년에는 블랙핑크 제니의 간호사 성적 대상화 논란으로 뮤직비디오에서 관련 장면이 삭제되는 일도 있었고, 애시당초 2021년에 롤린의 앨범 자켓이 바뀐 것부터 남성향 섹시 컨셉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지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열쇠는 바로 거기에 숨어 있었습니다. 케이팝은 갈수록 음악적으로 난해해지고 있었고, 컨셉은 고급지고 화려해지는 것을 추구하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대중들은 케이팝과 보조를 맞춰가며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세대를 그다지 가리지 않고 아이돌을 소비하던 때는 2세대가 마지막입니다. 게다가 주 소비층인 청년 세대 안에서도, 아이돌은 "보는 애들만 보는 문화"로 축소된 지 오래입니다. 물론 이 마니아층 숫자가 상당하고, 그들의 눈이 까다롭고, 충성도도 엄청나기 때문에 케이팝은 미친듯이 고속성장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아 나는 아이돌은 소녀시대까지만 알아"하는 사람들도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현재 걸그룹 중에서는 유일하게 '월드클래스'라고 할만한 블랙핑크 정도가 다시 마니아층 바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례적 경우랄까요.

케이팝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과 전혀 별개로, 이제 더이상 아이돌 트렌드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게, 인간은 원래 어렸을 때 들었던 음악을 계속해서 소비하기 마련이니까요. 'MB팝'이라 할만한 이명박 시대에 대중문화를 주로 소비했던 15세에서 25세들, 대략 80년대 후반생과 90년대 초반생들은 아직도 아이돌 하면 브라운아이드걸스나 카라, 티아라 등을 떠올립니다. 에스파가 아니라요. 하물며 요새 데뷔한다는 아이브, 빌리, 케플러, 뭐 이런 그룹들은 존재 자체를 아는 것도 신기한 수준인 거고요. 롤린은 그렇게 대중과 케이팝의 괴리가 점점 극대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등장했습니다.

2021년과 2017년은 그렇다면 뭐가 달랐을까요? 일단 2017년에는 대중과 케이팝이 이미 꽤 괴리된 상태였지만 "이정도로" 괴리되지는 않았었죠. 위화감을 느끼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2017년 시점에서 'MB팝'의 시대는 기껏해야 3-4년 전입니다. 패러다임 전환이 한 번 있었던 시기의 3-4년 전이면 사실상 고대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오히려 7-8년 전쯤 노래로 인식하니, "야 이거 복고 스타일이네"하면서 또 즐겨줄 심리적 거리가 다시 형성되었기에, 2021년에 롤린이 '편안하게' 받아 들여졌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그 내지르는 뽕끼와 섹시 댄스에서 아련한 추억 속 앨범을 뒤적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던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가장 열렬히 호응했던 이들은, 케이팝의 충성스러운 소비자였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트렌드에서 탈락한 청년 남성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케이팝에서 사라졌던 대중의 물결에 힘입어 롤린은 당당히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KZvWhCqx1s

당시 이런 MB팝과 2세대 대중의 귀환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저는 롤린이 비슷한 시기에 블랙핑크의 로제가 냈던 싱글, On The Ground를 꺾고 1위에 오른 순간을 꼽습니다. 로제, 블랙핑크 보컬의 상징이자 글로벌 스타죠. 이 곡은 당시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등장할 정도로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한 곡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이 갑작스럽게 역주행으로 등장한 브레이브 걸스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 곡이 굉장히 대조적이라는 게 재밌습니다. 로제는 호주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 곡도 영미권 팝 솔로 여가수들의 노래랑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글로벌'하죠. 가사도 보시면 재밌습니다. "나는 지금 하늘 위에 살지만 나에게 소중한 것은 땅에 있을 때도 다 있었어", 뭔가 주변에 감사함을 표하는 아주 편안하면서도 아련한 곡이죠. 그런데 롤린은 어떻습니까? ㅋㅋ 

온통 너의 생각뿐이야, 나도 미치겠어
너무 보고 싶어, 매일, 매일, 매일
자꾸 초라해지잖아 내 모습이
그대여 내게 말해줘 사랑한다고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의 恨인가...

브레이브 걸스와 롤린은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편안한 무언가를 일깨워줬습니다. 게다가 2017년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화려하게 귀환하는 신화적 서사와 함께 등장했죠. 그러니 2021년은 어쩌면 브레이브 걸스를 위한 조건이 착착 맞아 떨어진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조한 인기로 해체 직전까지 갔던 그들의 마음 고생과, 그런 가운데에도 팬들에게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모습과 분투가 있었기에 그런 '조건'을 잡아서 신화를 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고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브레이브 걸스는 신화적 성공 이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여기서부터 갑자기 장르가 전환됩니다. 다시 돌아온 편안한 'MB팝'은, 그 사이 엄청나게 변화한 한국의 대중문화 소비 환경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남초와 여초 커뮤니티로 극렬히 분열되어 있는 시장, 커뮤니티의 집단 행동이 아티스트들을 압박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환경, 대중과 팬덤 사이에서 복잡한 계산을 오갈 수밖에 없는 기획...

2016년부터 지금까지, 3세대와 4세대 아이돌 전설을 만들어낸, 케이팝 시장의 가혹한 면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