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2023/01/24
가족인데 어쩌겠어, 이 말이 없었다면 어떤 세상이었을지를 상상한다. 처음에는 돌봄 노동의 지난함에 대한 표현이었을 거다. 혹은 후속처리가 필요한 자식의 허물을 대하는 부모의 초월적 사고에서 뱉어지는 혼잣말일 거다. 한숨이겠지만, 부양자가 지녀야 할 의무의 무게감을 견디는 연료였을 거다. 이게 윤리적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정서이긴 하다.
문제는, 저 체념이 헌신적인 자신의 정신력 강화 차원을 넘어 ‘내가 헌신적인 만큼 너도’라는 화살이 되어 타인을 옭아맬 때다. 나아주고 길러줄 때 마치 그런 보답을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위를 향한 역할을 왜 안 하냐고 아래에게 눈치를 주고, 다그치고, 나무란다. 그리고 당당하다. 반대편 아무개는 주눅이 들고 헤쳐나가야 하는 현실도 몰라주는 가족이 야속해 입을 삐죽거리지만, ‘입만 삐죽거리는 게 다’라는 걸 안다. 답답함이 가슴을 누를 때, 환청이 들려온다. 가족인데 어쩌겠어. 유사품으로는 ‘가족인데 별 수 있나’가 있다.
그래서 가족인 거지, 이 말이 없었다면 어떤 세상이었을지를 상상한다. 오랫동안 긍정적인 뜻이라 믿었었다. 화목하고 친근하고 연대가 가능해서 가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화목하지 않아도, 친근 안 해도 가족이니까 화목하게, 친근하게, 서로 끈적한 것처럼 보여야 하는 강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보여지는 그림이 중요해지면, 따져야 할 입은 봉쇄된다. 모두가 그러하면 잘못된 풍습의 평등한 피해자들이겠지만 할 말 못 하는 이들은 ‘남녀노소’에 따라 정해져 있다. 이 억울함이 끓어오를 때, 순식간에 냉정을 찾는 방법은 하나다. 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로 내뱉는 ‘그래서 가족인 거지’라는 무례에, 할 말 못 하는 사람도 맞장구치는 거다. 그래야, 산다.
가족문제는 복잡하게 나열하고 따질수록 더 복잡해지는 특징이 있다. 해법을 단순하게 찾기 위해선 사고가 단출해야 한다. ‘가족이니까’라는 주술을 찾는 이유다. 물론, 이와 비례해 이쪽은 더 무례해지고 저쪽은 더 어그러진다. 차곡차곡 내상이 쌓여가는 쪽 역시 한쪽일 뿐이다. 해독제가 필요한데 진통제만 처방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알면서도 진통제를 찾는다. 장기적으로는 독이라는 걸 알지만, 가족에게 겪는 이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근본적인 치유를 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가족인 건 아님을, 아니어야 함을 깨닫는다. 가족끼리는 괜찮다는 데,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사람이 있기에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가족이라는 게 이유가 될 수 없음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 안에서 성차별을 겪는다. 가부장제의 냄새에 눌린다. 외모품평의 대상이 된다. 학력차별을 당한다. 직업의 귀천이 존재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틀린 인생 교훈을 강요받는다. 불편함을 드러내고 싶지만 ‘가족’이라는 큰 우산을 넘어갈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가족문제는 늘 덮어진다. 이야기하는 사람만 지치니, 입을 닫는 게 속 편하다. 정말 속이 편한 건 아니지만.
물론, 반대 방향에서의 무례도 많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인 부모의 덕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을 대단히 독립적인 인간처럼 묘사하는 '어른들'은 정말로 많다. 득을 취할 때는 전통주의자가 되어 조용하다가, 실이 있으면 갑작스레 탈가족주의를 외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 마음은 허하다.
물론, 반대 방향에서의 무례도 많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인 부모의 덕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신을 대단히 독립적인 인간처럼 묘사하는 '어른들'은 정말로 많다. 득을 취할 때는 전통주의자가 되어 조용하다가, 실이 있으면 갑작스레 탈가족주의를 외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 마음은 허하다.
명절이 지났다. 명절마다 가족이란 굴레의 견고함을 확인한다. 나와 부모의 관계, 나와 자녀의 관계, 나와 형제자매의 관계, 나와 친척들의 관계를 생각한다. 이십 년 전보다 나아졌는지, 십 년 전보다 나빠졌는지, 무엇이 더 곪았는지, 무엇이 조금이라도 녹았는지를.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가부장적 질서는 무엇인지, 혹은 내가 그걸 이용해 누군가를 위축시킬 수 있는 위치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그러면서 누군가의 아픔을 본인만 피해자인 줄 안다면서 우습게 여겼는지. 또 그런 식으로 다음 명절도 ‘가족이니까 별 수 없다’면서 지낼지.
가족이라는 견고함에 모두가 취약해진다는 것에 정말 동감합니다.
가족이라는 견고함에 모두가 취약해진다는 것에 정말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