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외삼촌의 추억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12/31
작은 외삼촌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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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부산에 갈 계획이었다. 대학 입시를 기쁘게 끝낸 조카를 비롯한 동생네 식구들과 부산에 모여 조카가 성인이 되는 해인 1월 1일을 기해 맥주나 와인 잔을 들고 해피 뉴 이어를 부르짖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뜻하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병원에 계시던 작은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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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갓집은 이른바 양반 가문이다. 용인 이씨. 하지만 ‘몰락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자존심은 구름 위에 머물지만 처지는 땅 위를 맴돌았다고나 할까.  외할아버지는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서울역 근처 염천교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가 외증조부에게 흠씬 두드려 맞았다고 한다. “양반의 후손이 무슨 장사를!”  그래서 들어간 것이 철도 소사였고 일제 강점기 이래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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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가 터지고 3일만에 서울이 떨어졌을 때  철도원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새롭게 서울을 장악한 ‘정부’의 공무원으로서 철도에 나가야 했다. 이 때문에 인민군 부역자가 돼서 서울 수복 이후 죽을 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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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큰아들, 즉 큰외삼촌은 인민군 부역자는커녕 잘못하면 인민재판, 잘해야 의용군으로 끌려갈 처지였다. 정치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가 활동하는 무슨 청년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었다. 뚜렷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게 ‘지역 빨갱이’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난리굿이 아니었다고 한다. 마루 밑에 숨고, 나도 기억나는 외갓집 재래식 변소 밑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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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외삼촌과 어머니. 거의 아버지와 딸수준.
 큰외삼촌은 1920년대생이었지만 작은 외삼촌과 우리 어머니는 40년대생으로 엄청나게 터울이 길다.  전쟁 때 작은 외삼촌은 여덟 살, 다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기억은 전혀 없지만, 작은 외삼촌은 이따금 전쟁 때 ‘빨갱이’들의 무서움을 얘기해 주시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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