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너무 쉽게 보았다 | 글과 책, 이론과 현실

단야
단야 · 관찰자
2023/10/04
pixabay
어둠 속에서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해를 결심할 때는 소설 <멋진 신세계>의 ‘존’을 들먹이며 감히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는가. 그게 자유라고 하면서 말이다. 고생이 뭔지, 고통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매독과 배고플 권리를 말했다. 더러워질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파도를 맞을 자유, 흔들리는 배에서 헛구역질할 자유, 적도의 태양 아래에서 노동할 자유, 달빛 아래서 고국을 그리워할 자유, 또 뭐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호기를 부리지 않았는가.

정작 나는 배에서 오물을 치울 때는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배가 조금만 동요해도 빌빌거리고, 뭍에서 온 전화 한 통에 길길이 날뛰지 않는가. 손톱에 박힌 작은 가시에 엄살 부리는 아이처럼 말이다. 나는 정녕 세상을 책으로만 배웠다. 그러니 지독하게 고단한 자유의 대가에 휘청거렸다.
- 김연식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 177쪽, 위즈덤하우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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