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어떤 삶이든 마지막 기회는 있다
2023/08/07
이 글의 제목은 영화에게 느껴진 감상이다. 내 생각과 다르다. 영화를 본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죄를 짓고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 삶에게도 갱생과 용서의 기회가 마땅하냐는 질문에 내 입장은 긍정이 아니다. 감독은 자신의 캐릭터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거구의 삶, 버림받았던 가족들은 그의 처지가 가엾어서 불편한 마음을 누르려 용서의 카드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반 강요에 가까운 용서. 하지만 난 그의 가족이 아니니까. 찰리가 과거에 저지른 과감한 선택은 용서받기엔 너무 잔인했다.
찰리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후 마주한 (찰리 자신에게는) 운명의 사랑을 선택했다. 선택의 대가로 가족을 버렸다. 복잡하지 않다. 찰리에겐 남편과 8살 아이의 아빠가 되기보다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성과 도덕률로 판단할 영역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훗날 “실수”라고 자기변호를 위해 말하는 건 치졸하다. 차라리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고 반복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찰리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 많은 부분들이 무너져 내려 통제 불능 상태였다. 접근하는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 ...
Copywriter. Author.
『저항 금기 해방-여성영화에 대하여』, 『너의 시체라도 발견했으면 좋겠어』, 『도로시 사전』, 『광고회사를 떠나며』, 『저녁이 없는 삶』 등을 썼다.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sk027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