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338편 - 이슬람 문화권에서 베두인의 정의와 민족적 실체, 최근까지 나타난 아랍계 베두인의 사회와 문화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24
이스라엘 군에도 베두인들로 구성된 경보병 특수부대가 4차 중동전쟁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부대의 지휘관 또한 당연히 베두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베두인들은 2차와 3차 중동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인해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이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베두인 병사의 지원 복무는 계속되고 있어서 수백 명 단위의 베두인들이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에는 베두인들로 구성된 BDRB (Bedouin Desert Recon Battalion) 부대가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거주하는 베두인들도 있다. 시리아에도 베두인이 6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시리아의 베두인들도 주변 국가인 요르단, 레바논, 터키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 팔레스타인 베두인 가족,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편이다. 베두인들은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에서 유태인 정착촌 등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촌락에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귀중한 재산인 당나귀를 사살당해도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못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유태인 아이들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학교도 못가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베두인이 자주 나타난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이스라엘의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극우 유대인들은 이들도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 흑인들과 동급의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베두인들에게서 반(反)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2013년에는 베두인 주민 수천 명이 거주지 파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여 여기에 놀란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달래려고 베두인 강제 이주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베두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나서면서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 무장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타도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다. 유목민들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 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유르트와 가축, 가재(家財) 등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유르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Ahl Al-Bait)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및 숙영(宿營)지 확보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과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낙타는 부족들의 공유물이었고, 부족 전원이 세력을 연합해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보통 베두인들은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 계층들이 있다. 

귀족과 평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라비아 제족들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 민들이며, 사하라 사막 남부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존재하고 있고, 노예와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부 유럽에서 데려온 지중해 코카소이드형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아프리카 수단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의 노예사냥에서 체포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 제도로 구분되는 계급 사회는 잦은 정복 전쟁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유럽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인과 흑인을 이슬람 화 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 민들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과 재물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 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과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왕래하는 유목 경제가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 수단으로 하는 베두인 족도 증가하였다.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 인들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볼 때 고대 베두인들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기반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러한 기반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요르단 인들은 관대함과 따뜻함, 친절함 등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근교의 작은 마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페트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예술을 지닌 유리 제품을 만드는 유리를 깔때기로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유목 경제적으로 볼 때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관광객 및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라비아 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 : 아리비안나이트>는 요르단 인의 작품이며 20세기의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으로 나타나며 이들 모두 베두인 출신이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민족 모두 부족 단위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면서 다른 부족들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베두인의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쟁 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기상이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기도 했다. 중재자들은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부족 내부의 관행(Sunnah)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베두인들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업 도시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과 가장 큰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라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신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적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되어진 지역들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도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 창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은 인종과 혈통적인 성격보다는 셈어라는 아랍어 계통을 모국어로 공유하는 민족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6세기까지 아라비아 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 한정되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로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혹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중동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언어적으로 동화되면서 베두인-아라비아 인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아라비아 인들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 중에서 범아라비아주의가 발흥하였고, 아랍어 화자들 사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지칭했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들로 볼 때 아라비아 제국을 뜻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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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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