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13
제대로 글을 쓰려면, 피해자가 쓴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라는 책도 읽고, 손병관 기자의 책과 "첫변론"이라는 영화도 보고, 양쪽 입장의 근거들을 정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해 시간과 정성을 쏟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에 대한 의견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몇 가지 있다.
한편에는 피해자 잔디를 악마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편에 서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잔디의 주장을 모두 긍정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잔디의 입장을 일부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2차가해의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글에 이런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한편에는 피해자 잔디를 악마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편에 서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잔디의 주장을 모두 긍정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잔디의 입장을 일부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순간 2차가해의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글에 이런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기자 : 피해자가 전보를 원했다는 뜻인가?
A : 본인이 남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남고, 그게 아니면 떠나는 것 아니냐? 나가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다 내보내 줬다. 시장이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시장이라도 나가겠다고 강하게 얘기하는 직원을 막을 방법이 없다. 옆자리에서 같이 일한 비서 3명은 차례로 다 나갔다. 그 친구들도 안 나갔다면 내가 이런 얘기하지도 않는다.
이가현 님은 이것이 비논리적인 이야기라고 하셨다. 벤다이어그램까지 그리며 설명을 하셨고, 어떤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A씨의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비논리적이지도 않다. 인터뷰는 인터뷰 대상이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내 줄 뿐이다. "피해자가 전보를 원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A는 강하게 요청했으면 보내줬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전보는 요청했지만 말리니까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 수준이라 안 보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내가 볼 때는 그냥 그뿐인 것 같다. A씨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논리적이라거나 잔디 씨를 음해하는 이야기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논...
궁금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배우고자 노력하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으면 공유하고 공감을 구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서툰댄서 '성추행과 관련된 문제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이 결국 '분명한 거부의사의 표현이라고 믿는다'는 생각 자체에 대한 반대의견이었습니다. 사전 예방 차원에 거부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이 결국 피해자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옷에 뭐가 묻었으니 떼어준다고 했을 것이고, 네일아트를 자세히 본다고 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는 행위자가 별 뜻이 없을 거라고 선해하기도 합니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거부한다고 사전예방이 불가한 일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피해자가 거절하면 할수록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최근 공군 내 성폭력 때문에 한 여군이 자살한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직장 내에서는 어떨까요? 거절하고 의사를 분명히 했는데 오히려 불이익 조치를 당하거나 혼나거나 괴롭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가 더더욱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요. 과연 성추행과 관련된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행위가 거부의사 표현일까요? 제 생각에는 철저한 교육, 직장 내 관리자급의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엄격한 대응, 평등한 조직문화, 주변인의 높은 성인지 감수성이 문제를 예방할 것이라고 봅니다. 피해자의 거부의사표현이 아니라요.
마지막 문장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이가현 저는 성폭력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에 대해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서, 어떤 부분에 반대를 하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부의사를 밝힐 수 없는 경우들도 있겠지만, 사전 예방 차원에서 거부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사후적으로 처벌을 요구하는 것보다 나은 경우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인정하시기도 하셨구요. 경우마다 다를 것입니다. 절도를 당한 사람에게 왜 예방에 소홀했느냐고 묻는 것이 적절할 때도 있고 적절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예의에 맞지 않고, 아마 주장하시는 내용들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태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답글 감사드립니다.
서툰댄서님 안녕하세요. 글에 대한 답글 감사합니다. 써주신 내용의 여러 가운데에 제가 꼭 반대의견을 표현해야 하는 부분만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서툰댄서님께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 말씀하신 '성추행과 관련된 문제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은 분명한 거부의사의 표현이라고 믿는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적인 언행을 하는 행위자가 실행에 앞서 상대방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분명하고 명시적이며 현재적인 동의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거절이 성추행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것일수는 있겠죠. 하지만 결정적인 예방 방법은 가해자가 행위를 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의(적극적 합의) 여부는 성폭력의 판단기준에 대해 국제사법기구와 인권기구가 제시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다만, 피해자의 거부 의사표현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물론 피해자가 거부의사를 잘 표현할 수 있면 좋겠죠. 사안의 해결이 사후에도 쉬워지겠죠. 그래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의 '자기방어훈련'이 유행하고, 크게 거절하고 소리지르는 연습, 도망가는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절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피해자가 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지요. 이것도 약자가 감내해야 하는 추가적인 생존 노동이라는 점은 감안하고요.
하지만 거절의 의사표시 여부는 상대방에 따라서, 피해자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실행여부가 불투명합니다. 그리고 거부의사표현을 미처 못했더라도 그것이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사회정치경제적 권력, 유명세, 직장 상사, 친족, 불법촬영 피해촬영물 소지 여부, 흉기 소지 여부, 주변 상황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거절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평소에 내심의 의사와 바깥에 의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표현을 하는 사람도 살면서 반드시 한두번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오겠죠. 이렇게 불투명한 기준을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거나 성폭력의 예방방법으로 해 왔던 것이 지난 한국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내 생사여탈권을 쥔 직장 상사에게 거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그 때 도망치거나 거절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그러면 왜 군대 영장 나왔을 때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안 하고 군대 가고 나서 이제와서 군대가 차별이라고 하냐'라고 반박했던 바가 있었죠.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느끼시나요? 왜 그럴까요?
성폭력의 판단기준이 더 이상 피해자의 거절 여부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몇 년간 우리 사회가 만들어온 합의였습니다. 요새 초등학생들도 성폭력 예방교육을 한다고 하면 교육을 시작도 하기 전에 '안돼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라고하면서 거절이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조롱합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초등생들도 아는 거죠. 그래서 요새는 적극적합의, 동의여부, 주변인의 개입이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고 교육하는 중입니다. 시대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중입니다. 서툰댄서님도 새로운 시대 변화에 적응하시길 바라며 긴 글을 적어봅니다.
서툰댄서님 안녕하세요. 글에 대한 답글 감사합니다. 써주신 내용의 여러 가운데에 제가 꼭 반대의견을 표현해야 하는 부분만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서툰댄서님께서 글의 마지막 부분에 말씀하신 '성추행과 관련된 문제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은 분명한 거부의사의 표현이라고 믿는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적인 언행을 하는 행위자가 실행에 앞서 상대방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분명하고 명시적이며 현재적인 동의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거절이 성추행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것일수는 있겠죠. 하지만 결정적인 예방 방법은 가해자가 행위를 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의(적극적 합의) 여부는 성폭력의 판단기준에 대해 국제사법기구와 인권기구가 제시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다만, 피해자의 거부 의사표현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물론 피해자가 거부의사를 잘 표현할 수 있면 좋겠죠. 사안의 해결이 사후에도 쉬워지겠죠. 그래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의 '자기방어훈련'이 유행하고, 크게 거절하고 소리지르는 연습, 도망가는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절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피해자가 되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지요. 이것도 약자가 감내해야 하는 추가적인 생존 노동이라는 점은 감안하고요.
하지만 거절의 의사표시 여부는 상대방에 따라서, 피해자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실행여부가 불투명합니다. 그리고 거부의사표현을 미처 못했더라도 그것이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사회정치경제적 권력, 유명세, 직장 상사, 친족, 불법촬영 피해촬영물 소지 여부, 흉기 소지 여부, 주변 상황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거절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평소에 내심의 의사와 바깥에 의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표현을 하는 사람도 살면서 반드시 한두번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오겠죠. 이렇게 불투명한 기준을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거나 성폭력의 예방방법으로 해 왔던 것이 지난 한국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내 생사여탈권을 쥔 직장 상사에게 거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그 때 도망치거나 거절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그러면 왜 군대 영장 나왔을 때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안 하고 군대 가고 나서 이제와서 군대가 차별이라고 하냐'라고 반박했던 바가 있었죠.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느끼시나요? 왜 그럴까요?
성폭력의 판단기준이 더 이상 피해자의 거절 여부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몇 년간 우리 사회가 만들어온 합의였습니다. 요새 초등학생들도 성폭력 예방교육을 한다고 하면 교육을 시작도 하기 전에 '안돼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라고하면서 거절이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조롱합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초등생들도 아는 거죠. 그래서 요새는 적극적합의, 동의여부, 주변인의 개입이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고 교육하는 중입니다. 시대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중입니다. 서툰댄서님도 새로운 시대 변화에 적응하시길 바라며 긴 글을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