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도와줘

배윤성
배윤성 · 에세이집 '결론들은 왜 이럴까'를 냄
2023/10/10
  뭘 좀 해볼까 하는 데 몸이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는 뇌와 눈, 허리의 도움이 절실한데, 이것들이 ‘쓸 만큼 써먹었으니 너무 많을 일을 시키지 말라’ 고 한다. 가만히 있어도 손끝과 발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이래서 어른들이 몸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고 했나보다. 시력, 청력, 근력, 지구력 등 력(力)자 붙은 모든 것에서 이른 노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원래부터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뇌, 일명 머리가 가장 먼저 노화의 신호를 보낸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자동차 키나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몰라 넓지도 않은 집을 헤매는 것은 기본이다. 방금 본 책이나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본 적 없는 줄 알고 펼친 책에서 내가 끄적인 낙서를 발견하고 당황한다. 읽었다는 것도 기억할 수 없는 데 내용은 당연히 흔적도 없다.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를 정리하는데 딸이 관심을 보인다. 
  “엄마 본 거 또 볼려구?”
    “내가 언제 봤는데?”
  “어머머. 이 리스트 중에 절반은 본 것들이잖아. ‘그을린 사랑’은 나랑 같이 봤구, 이 애니메이션은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내가 왜 이러지? 아주 깜깜한대?”

  나는 혼돈에 빠진다. 절망이라 해도 좋다. 딸의 말을 듣고 보니 ‘이미 보았던 영화’들인 것도 같다.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 친구는 만날 때마다 ‘내가 왕년에 컴퓨터 같은 기억력을 가졌었는데’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조차 까먹은 그녀를 보면 기억력의 여왕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작금의 내 증상과 비쳐보면 남의 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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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학을 전투적으로 공부하며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매일 읽고 생각하고 쓰는 생활을 하다보니 내가 축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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