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 찬성하는 사회에서 블라인드 채용은 무용하다

오찬호
2023/03/24
아이가 햄버거를 먹고 신장이 망가진다, 그래서 보호자는 인과성을 주장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관련뉴스의 댓글에는 꼭 이런 식의 반응이 등장한다. “어떻게 아이에게 햄버거를 먹일 생각을 하지? 우리 아이는 9살인데 햄버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무례하지만, 빈정거림이 대개 그렇듯 당당하다. 그리고 자화자찬은, 언제나 생뚱맞다. 
   
그저 악성댓글 정도로 볼 수 없는 건, 사람의 감정이 사회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고 있음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을 먹이겠다는 의지가 집착이 되고 나아가 강박의 수준에 이르면 그게 윤리로 해석되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 착각한다. 생활습관이 선악으로 구분되면 쉽사리 자신과 다른 쪽을 찾아내 강하게 비난하며 ‘노력하지 않은 업보’라고 조롱한다. 이는 다짐과 실천이 투박하게 부유하는 자기계발 시대의 대표적이 현상이다.
 
노력이 도덕이 될 때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전문적인 일을 하는 건 사회적으로도 매우 효율적이다. 의사가 능력이 없으면 환자는 병원 가서 더 아파지게 되니, ‘사람이 진국’이라서 의료행위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적 노력’과 그 노력의 전제 조건인 ‘꺾이지 않는 마음’이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은 명백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의 원인으로만 언급되면서  ‘도덕’으로 간주된다는 거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이슈마다, 절제된 토론이 아닌 조롱과 멸시의 언어가 남발되는 건 ‘비정규직이 정규직을 요구하는 걸’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서다. 상대가 윤리적이지 못하니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며 우롱한다. 이때부터 악순환은 선순환된다. 
   
① 불평등의 크기를 줄이는 정책은 ‘열심히 공부한 사람을 무시하는’ 역차별이라는 항의에 막혀 표류하니 ② 일자리 양극화는 심해지고 ③ 몇몇 일자리는 바늘구멍이 되어 통과하는 시간과 비용은 높아져 ④ 그 노고가 억울하니 ①번부터 반복된다.

몇 번 순환하다 보면 그 사회에는 ‘시험’만 남는다. 잘해도 본인이 잘 해서고 못 해도 본인이 못 해서다. 기회는 평등한지, 과정은 공정한지, 결과는 정의로운지 따지지 않는다. 사람의 생애사가 납작하게 평가받는 곳에선 철학도 빈약하다. 누구나 시험을 칠 수 있으니 기회는 평등한 거고, 부정행위 없었다면 공정한 거고, 그 결과에 토 달지 않는 게 정의로운 거다.
 
자기 계발이 과잉될 때
 
자기 계발은 잘못이 없다. 밑도 끝도 없이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그걸로 우열, 그러니까 잘났고 못났고를 광범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묻고 답하고 받아들이는 ‘과잉’이 문제다. 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에서 미래가 불안하기에 스스로에게 더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는 대학생들이 ‘서열’에 어떻게 종속되어 있는지를 다뤘다. 
   
10년이 지난 책이지만, 강의시간에 이 맥락이 일상 속에 어떻게 압착되어 있는지를 발표한 학생이 생각난다. 여기저기 취업면접을 보러 다니며 느낀 경험이었는데, 면접관이 함께 앉은 지원자들의 학교이름을 언급할 때 그 빌어먹을 서열표에 따라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순식간에 오가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위의 학교가 등장하면 초조해지고, 아래의 이름이 등장하면 청심환을 먹은 것처럼 여유가 생기더라는 거다. 그리고 덧붙였다. 긴장하니 아는 것도 실수하고, 침착하니 모르는 것도 자신감있게 대답하더라는. 
   
우열에 기반한 자기통제력은 결과로 이어진다. 떨지 않으니 합격하고 조마조마하니 불합격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보았던, 그렇고 그런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멍청한 모습과 역시 자신이 보았던 명문대 학생들의 수려한 언변은 ‘아, 저래서 그렇구나’라는 추임새가 곁들여지면서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 끝에는 능력에 따른 차이는 어쩔 수 없고 그걸 구분하는 건 차별이 아니라는 논리구조가 형성된다. 이를 바탕으로 툭툭 내뱉는 일상 속 말들이 여론이 되면, 능력주의가 민주주의를 증명하는 것처럼 포장된다. 
   
공정하다는 착각만큼 차별은 커진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능력주의 패러다임의 문제를 보완하는 것처럼 소개된다. 편견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숨기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자는 취지일 거다. 학교 이름부터 괴상한 스펙들까지 나열된 종이쪼가리는 찢어버렸으니 실력만 있으면 기회를 보장한다는 간단명료한 이치다. 약간은 동의한다. 하나의 전제만 확인된다면 말이다. 태초부터 그랬다면 말이다. 태초부터 차별은 없었고, 차별은 ‘나쁜 것이니’ 테스트도 엄격해야 한다는 사회적 동의 위에서의 블라인드라면 말이다.
   
그런가? 우열의 감정이 쉽게 오가는 면접장으로 다시 가보자. 학교 이름을 덮어버리면 편견은 배제되고 공정은 완성될까? 서울대라서 자신감을 갖고, 서울대 이름만 들어도 자괴감이 생기는 건 그날의 바이오리듬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생애과정에서 차곡차곡 학습된 감정이다. 우리네 삶은, 결코 블라인드가 아니다. 
   
성적은 외부로 드러난다. 공부 잘하면 칭찬 받는다. 이는 잘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으로 이어져 실제 잘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는 선순환이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못하면 욕을 먹고, 안 될 거라는 자기비하로 이어져 스스로의 한계를 낮게 잡는다. 이게 ‘모여져’ 다음 단계에 진입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평가받는데 블라인드 한들 결과는 크게 달라질 리 없다. 
   
차별을 그대로 둔 토대에서의 블라인드는 공정했다는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차별이 없었으니, 결과를 따지지 말라는 근거로 사용된다. 문제를 보완하려다가 사태를 악화시키는 꼴이다. ‘차별을 차별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능력주의가 사람들의 일상 안을 지배하면, 차별을 줄이자는 정책은 옳게 해석되지 않는다. 왜 그게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할 필요가 있냐’는 불평의 목소리가 더 크면 블라인드 이후에도 편견은 계속 유지된다. 잘못되었으니 블라인드 하자는 건데, 그게 왜 잘못된 거냐는 입장을 고수하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맞는’ 사례만을 찾는다..  
   
그래서 서울대 타이틀을 지닌 이의 업무상 실수는 ‘누구나 다 하는 실수’로 이해하지만 처음부터 의아하게 여겼던 아무개의 동일한 실수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각인된다. 적절한 사례만을 수집하다 보면 결국엔 “대학 이름과 사람은 상관이 있더라”는 케케묵은 확증편향에 빠진다.

차별하지 말자는 건 똑같이 보상받자는 게 아니다. 어떤 기준의 아래에 있다는 이유로 혐오 받는 게 차별이다. 그 기준으로 인생을 부정 당하는 게 차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선발하냐가 아니다. 선발된 사람과 아닌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짚어야 한다. 노력과 성실을 '사람을 구분해서 천대해도 되는' 이유로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완벽한 테스트일지라도 그 결과로 차별이 정당화될 거다.
공정한 선발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차별에 둔감해진다 -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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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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