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이라 해보는 푸념

이가현
이가현 인증된 계정 · 페미니스트 정치활동가
2023/03/08
오늘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날이다. 남자 못 버린 페미니즘 연재를 써야 하지만 여성의 날까지 남자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영 마음에 걸려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항상 생각이 많지만, 요새는 딱히 드는 생각은 없다. 오늘 오전에 봤던 오피스텔에서 분신하신 80대 할머니의 기사가 계속 맴돌 뿐이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자리에서 안부를 나누며, 너는 할머니가 되었을 때 뭘 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는 그런 걸 물어보는 게 페미니스트 특이라고 말했다. 좀 찔려서 웃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는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좋아하는 장혜영 감독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지 않은가.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후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모습은 이렇다. 
   
빨간 담장과 정원이 있는 빨간 벽돌집인데...
내부 인테리어는 통나무집st로 옛날 감성이 살아있고, 민트색 천장 선풍기가 돌돌 돌아가고,
시계추가 달린 커다란 괘종시계가 한 켠에 걸려서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고,
메가커피 앞을 지날 때마다 사람 홀리게 하는 중독적인 커피 향이 흘러나오는 카페..
정원에는 나무와 덩굴이 우거져 햇빛은 조금만 들어오고 음침, 시원한 가운데..
자동차 엔진소리나 비행기 소리가 아닌 새소리가 들리고,,
쭈뼛쭈뼛하는 젊은이들한테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는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있다. 
아무튼 여름이었다.

이 할매가 바로 나다. 그래서 후세대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힘들 때 찾아오면 ‘나 때는~’하면서 상담도 해 주고 격려도 해주고, 가끔 용돈도 주는 그런 할매가 되고 싶다. 몇 년 전 페미니즘 북카페 운영의 쓴맛을 알아버리고는 '이 할매의 꿈이 과연 가능할까?' 회의감이 잠깐 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 미래를 대체할만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내가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 필요했던 응원과 지지, 위로를 해주는 포근한 선배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이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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