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이문영 인증된 계정 · 초록불의 잡학다식
2023/06/08
사반세기가 지난 1987년 6월.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의외로 이때의 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세월이 정말 많이 흘러갔음을 느끼게 된다.

가령 이한열 군의 죽음이 6월대항쟁의 원동력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본다. 미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한열 군이 6월 항쟁의 한 축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죽은 것은 6.29 선언이 나온 뒤인 7월 5일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한열 군의 부상이 원동력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7월 9일, 이한열 군의 영결식에는 정말 백만 명 쯤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모였었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그리고 80년대 독재정권과의 마무리처럼 보였다. 문익환 목사님이 그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쳐부르셨다.

사실 5공 시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권양 성고문 사건이었다. 1986년 여름에 터져나온 이 사건은 정말 쓰레기들과 내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 5공은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여 이 사건을 사회면 탑에도 올리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작은 제목을 달고 사회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편집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정부의 주둥이가 되어서, "성고문은 없었다. 성마저 도구로 삼는 운동권" 등의 파렴치한 날조극을 벌였던 신문도 있었다. 뭐, 어느 신문인지 지목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그러나 사회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86년 5.3 인천투쟁이 실패하고, 권양 성고문 사건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월 15일 중앙일보에 2단 기사로 연행조사받던 대학생이 조사 중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박종철이 고문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지침이 내려왔지만, 이미 이 사건을 외신들이 주목하면서 언론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버렸다. 1월 18일 동아일보는 1면 톱으로 기사를 확대했다.

1월 13일 자정에 연행되었던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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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이글루스에서 사이비•유사역사학들의 주장이 왜 잘못인지 설명해온 초록불입니다. 역사학 관련 글을 모아서 <유사역사학 비판>, <우리가 오해한 한국사>와 같은 책을 낸 바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역사를 시민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책들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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