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9/17
내비게이션은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고 알림을 종료한다고 했다. 뭔가 잘못 들어온 느낌이었다. 차는 아파트단지 안으로 들어와 있어서 더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돌려 천천히 차를 몰았다. 경사진 아파트에서 내려가는 맞은편 길, 복잡한 도로에 걸린 흑백의 펼침막이 보였다.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의원을 추모합니다.' 2018년 8월이었다. 

고 노회찬의원이 안장된 곳. 액자속의 그는 웃고 있었다. - 살구꽃
   
회색의 칙칙한 양쪽 전봇대를 기둥으로 연결해 놓은 펼침막. 그걸 보고도 금방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모란공원은 눈에 띄지 않아 한산하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일하게 꽃집이 한 군데 있었다. 밖에 나와 있는 꽃들은 거의 조화였다. 달랑 한 곳의 꽃집이 문을 열었다. 나는 고무 양동이에 담긴 흰 국화 두 송이를 샀다. 꽃집 주인은 무심한 듯 국화 밑동의 젖은 부분을 가위로 잘라 포장도 없이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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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7월 23일(월), 그날도 집안에 널린 잡다한 일들 앞에서 간신히 세탁기만 돌리고 잠시 식탁의자에 앉아있을 때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찜통더위에 심신이 흐느적거렸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열자 속보가 떴다. '노회찬의원 사망'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뭔가 서늘한 기운이 두 어깨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가 정의당 국회의원이라는 것, 티브이 화면에서 만나는 그의 모습은 하고많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구별되었다. 그는 해직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어렵고 힘든 사람들 가까이에서, 치열한 투쟁현장에서 여유와 재치로 함께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가 시나브로 다가왔다. 평소 그의 말은 어렵지 않았다. 어떤 어려운 주제도 그의 말을 통해서라면 쉬웠다. 또 재미있었다. '노회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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