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하여, 『하얼빈』

렉토르 · 비평에 관심이 있습니다.
2023/08/06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100여 년의 격차를 두고 있는 지금, 거의 신화가 되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안중근이 살던 시대에 일어난 저항 운동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으로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화로 등재된 안중근은 우리에게 몸이 아닌, 언어로 다가온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 문장은 안중근의 실존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도 신이 아닌 인간이었으므로, 그가 권총을 꺼내 일곱 발의 탄환을 발사하기까지, 그리고 교수대에 목이 걸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사회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 불안과 결단과 죽어감의 시간을 저 문장은 무참히 살해한다. 김훈의 『하얼빈』은 민족 영웅이라는 신화에 가려진 안중근의 실존을 복원한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의사 안중근이 아니라 인간 안중근과 만난다.

  그렇지만 『하얼빈』은 소설이므로 허구다. 우리가 김훈의 책에서 만나는 안중근과 그의 시대는 미학적 형식으로 채색되어 있다. 등장인물의 언어는 서로 변별되지 않고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닮았다. 안중근의 말은 묵직하고 단정하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얼빈』, 236쪽. 이하 쪽수만 표기) 그런데 묵직함의 정도로 보자면 안중근의 적수는 이토가 아니라 일본 천황 메이지처럼 보인다. '전하의 슬픔은 인륜에 따른 것이로되 지금은 학업에 전념할 때다. 슬픔을 과도히 하지 마라.'(169쪽) 『하얼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국적과 계층을 막론하고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의해 양식화되며, 동일성을 보인다. 소설 속 세계는 우리가 체득한 반일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을 독특한 방식으로 탈색한다. 역사와 허구가 겹치면서 고정관념을 흔들어 버린다. 이토와 안중근의 내면이 엇갈리며 묘사되는 형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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