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조건

최재영
최재영 · 정치의 한복판에서 철학하기
2022/12/13
연말이라 술자리가 많습니다. 서른 즈음 20대 후반 남자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할 겁니다. 이미 취업해 안정을 꿈꾸는 친구, 꿈을 좇아 일상을 바친 친구, 방황하는 친구…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사랑 이야기에는 모두가 눈을 반짝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떻게 만나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하는 대화는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요새 연애하는 사람 보기가 꽤 어렵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요. 저는 고등학교 선배를 대학시절에 꾀어 7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 대부분은 연애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쉬이 알리지 않습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여자친구가 있느냐 물어보면, 처음에는 연애하지 않는다고 답하다가, 결국 나중에 털어놓습니다. 사귀긴 사귀는데 아직 공개하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왜 부담스러운지는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우정을 위해서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하니까요. 그런데 굳이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은 말을, 친구가 꺼냈습니다.

어렸을 때 만나는 게 참 좋은 것 같아. 다 커서 사람을 만나면 조건부터 보여. 순수한 사랑은 어려울 것 같아.

무슨 조건이냐 물어보니 여러 가지를 늘어놓습니다. 직업, 연봉, 재산, 가족, 학벌, 외모, 취미, 나이 등등... 취하지만 않았다면 밤새도록 말하겠다 싶었습니다.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마음보다 이런 조건들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조건 중에서 어느 정도만 만족하면, 사랑하지 않아도 일단 만남을 시작해볼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만나면서 알아가다 아니다 싶으면 멈추는, 그런 방식의 관계가 꽤나 흔하게 보입니다.
이제 더는 첫눈에 반하지 못할 것만 같다고도,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불 같은 사랑을 해본 적 없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압니다. 뜨겁게 사랑했고 아프게 헤어졌던 그 연애의 역사를 저는 옆에서 지켜봤거든요. 그래서 달리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너는 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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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의회에서 밥벌이하며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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