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68편 - 지하자원, 수력자원, 인구 수, 넓은 경지 면적에 세계적인 쌀 수출국인 태국, 어쩌다가 후진국 & 개발도상국이 되었는가?, 태국의 현대사를 보고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21
태국은 인지도 면에서 베트남과 함께 인도차이나 반도의 투톱이다. 전통적으로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맹주 역할을 해왔으나, 말레이시아의 미칠 듯한 고속성장과 엄청난 수의 인구를 앞세운 인도네시아가 G20에 진입하면서 이들보다 발전 가능성이 떨어진 상황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변국인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에 미치는 문화적, 경제적 영향이 크다. 지리적으로 봐도 내륙국인 라오스, 소국인 캄보디아, 말라카 해협으로 인해 왠지 고립되어 보이는 미얀마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이들 나라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사진 : 세계적인 쌀 수출국 순위표, 사진출처 : Bangkok Post, By PHUSADEE ARUNMAS

당연히 역사상 이들 인접국가와 늘 대립과 동맹을 반복했던 관계였는데, 1767년 콘바웅 왕조가 당시 태국에 있던 아유타야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더더욱 관계가 악화되었다. 물론 지금은 경제적 격차로 인해 역으로 태국인들이 미얀마인들을 크게 압도하는 상황에 있다. 태국은 지하자원, 수력자원, 인구 수, 넓은 경지 면적에 세계적인 쌀 수출국일 정도로 동남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를 자랑하고 있다. 나라가 잘 살게 될 주요 기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모두 완비가 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태국이 왜 지금과 같이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상태로 되어 있는가?

태국은 우리나라 조선보다 먼저 나라를 개방했다. 아유타야 왕조부터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고 외국인의 경우 아유타야에 거주할 시 국왕의 친위군으로 병역에 임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아유타야에서는 외국인의 정계진출이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개방정책은 계속되어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때는 그리스계 영국인 콘스턴틴 풀콘(Constantine Phaulkon; 1647~1688)이 고위직에 오르고, 프랑스에 친선사절을 보냈으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도 친하게 지냈다. 당시 프랑스 및 서양 세력과 평화적으로 대등하게 교역한 나라는 태국이 유일했다. 

짜끄리 왕조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시대에는 재임 기간 동안 태국의 현대화와 개혁정책을 패기 있기 몰아붙였다.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교통망과 법체계를 선진화하는 등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적 성격은 그가 서구식 교육을 완전하게 이수한 최초의 태국 국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당시에 우리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을사늑약이 이루어져 나라의 주요 중요한 부분들이 일본에게 침탈당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이는 철저히 비교가 된다. 라마 5세의 개혁적 추진이 쏟아지며 제도적으로는 추밀원과 내각평의회, 재무부를 신설했고 국가 제도를 비롯한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개혁을 선호하면서 왕자들에게는 정부의 요직을 맡기는 동시에 유럽 파견을 통해 선진 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

전임 왕이었던 라마 4세는 라마 3세가 전쟁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세의 침입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당시 위협적인 두 국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 대나무 외교를 펼쳤다. 과거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와의 관계로 인해 친숙한 국가라고 생각했던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을 합병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자 태국의 입장에서 프랑스는 가장 위협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런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로 편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영국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아 1896년에 영국-프랑스 양국 간의 조약에 따라 독립을 지키게 된다. 이러한 라마 5세의 현명한 대나무 외교가 태국을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지 않는 국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에 태국은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 놓일 정도로 발전한 국가였다. 1910년에 라마 5세가 죽은 뒤 라마 6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고 사치와 낭비만 일삼아 아버지 라마 5세가 어렵게 일구어 놓은 국가에 재정적자를 안겼으며 국고가 비어 있게 됨에 따라 태국 짜끄리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 등극한 라마 7세는 영국 이튼스쿨 출신에 프랑스 군사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나 국정 수행능력은 미흡했기에 그 또한 문제가 많았다. 그러는 사이 1929~30년에 세계적인 대공황이 발생해 태국 경제는 파탄에 놓이게 되고 전인 라마 6세의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탕진한 국고는 회복 불능에 놓이게 되었으미 라마 7세의 무능은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 영향은 군부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1932년 피분 송크람에 의해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시암 혁명"이라는 사건으로 태국 역사상 최초의 군부쿠데타로 인식되었다. 

국왕의 무능과 사치 및 방탕, 그리고 잦은 군부의 불만에 이은 쿠데타, 그러면서 발생한 부정부패, 피분 송크람의 전제적인 철권 군사 독재, 외교에서의 독선으로 인해 독일, 일본의 편을 들었고 패전국의 멍에는 면했지만 태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게다가 라마 8세가 1946년 피격당해 사망하면서 국가의 혼란은 가중된다. 송크람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지만 6.25 전쟁 참여를 명분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의 원조는 부정부패를 더욱 키웠고 송크람 내각은 부정선거로 다시 당선되면서 나라의 혼란은 지속된다. 이후 베트남 전쟁 등으로 동남아에 공산화 위협이 계속되자 1971년부터 반공독재가 행사되어 태국은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한편 1968년부터 시작된 대학가 민주화 시위는 1971년 비상사태 선포 후 1973년에 가장 격화되었다. 그렇게 해서 결성된 새 민주정부 총리에 탐마삿 대학의 법학 교수인 '산냐 탐마삭'이 임명되었지만 역시 운동권과 정치 행정 수행 능력은 별개라는 말이 정확했을 정도로 그는 행정력에 있어 매우 무능했다. 

군부가 물러간 후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관광을 비롯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1980년대 태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다. 엔고로 일본 제조업체들이 노동력이 저렴한 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태국의 수출은 급속히 증가한다. 1985년과 96년 사이 태국 경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연평균 9%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 성장으로 방콕에 중산층이 늘어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지만, 농촌 특히 북동부 지방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수도 방콕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 지역은 가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된다. 이것은 이후의 정치적 불안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치자 지난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성장이 갑자기 멈춰섰다. 저임금으로 투자를 유치했지만 태국 경제의 경쟁력은 여전히 낮아 90년대 중반 다국적 기업들이 급속한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으로 이동하자 태국 경제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연쇄 부도로 실업률이 급증한다. 한편 정계는 민주주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관유착과 부패로 인해 태국은 마침내 회생불능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이러한 경제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을 타계하고 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이끌어 갈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치명적이다. 민주진영에도, 군부에도 그러한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라마 5세와 같은 확고한 의지와 카리스마를 가진 국왕도 없다. 리더가 없다는 것, 그 리더의 소중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태국이다.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리더가 없기에 태국이 여전히 후진국 & 개발도상국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국은 라마 5세와 같은 인물, 혹은 라마 5세의 재림을 원하고 있다.

그런 리더가 없음을 우리도 같이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태국보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고 그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발전된 IT 산업 등, 여러 기관 산업과 반도체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조금의 성장률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끌어갈 수 있는 리더가 없다면 우리도 태국 같이 추락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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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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