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집 대문을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면 국제 시장이 있고, 국제 시장의 깡통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보수동 책방 골목을 갈 수 있는 곳에 집이 있었죠. 덕분에 일본 문화를 아주 빨리 접할 수 있었습니다. 티브이의 채널을 돌리다 보면 일본 방송이 나올 때도 있었고, 불법 복제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길의 리어카에서 일본 노래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동네에는 일본 잡지를 팔던 곳들이 많았던 터라 패션 잡지 뿐만 아니라 로드쇼, 뮤직라이프 같은 영화 잡지나 음악 잡지들도 일찍 접한 편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와 일본어는 전혀 몰랐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쁜 옷들과 멋진 모델들을 보기 위해 용돈을 받자마자 매달 논노와 맨즈 논노를 사 봤고, 서로 좋아하는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찢어 교환하기도 했죠. 서점 주인이 잘난 척을 하면서 알려준 모델들의 이름 ‘아베 히로시’, ‘카자마 토루’는 마치 굉장한 일본어인 양 외우고 다니곤 했습니다.
당시 저와 제 친구 K가 꽂힌 것은 맨즈 논노 특집 기사로 나온 ‘리바이스 501’과 ‘컨버스’의 척테일러 농구화였습니다. 흰 티셔츠와 리바이스 501, 척테일러 오프화이트의 컨버스를 신고 테니스 라켓을 든, 구릿빛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카자마 토루의 사진을 보며, “우리 나중에 일본 가면 리바이스랑 컨버스 꼭 사자!”라고 다짐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때는 일본 문화에 한창 빠지기 시작할 때라 한국에 없었던 리바이스나 컨버스 뿐만 아니라 뭐든 다 좋아 보였지만, 그 중 ‘일본 청바지’는 정말 갖고 싶었습니다. 동네 보세 옷 가게 주인과 친해져, 주인이 도쿄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입고 있는 멋지게 페이딩 된 리바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