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중기의 호민관(김경현 저작, 성균관대 출판부; 2022. 4.)

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4/11
  알라딘: 로마 공화정 중기의 호민관 (aladin.co.kr)
출처; Aladin

  이 책은 로마 정치가 '잘 굴러가던' 공화정 중기, 즉 BC 286년부터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 전까지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이 정치에서 한 역할에 주목합니다.

  저자의 주장은

  1. 현재까지 통설은 "호민관의 관직 창설 명분은 평민의 보호였으나, 그라쿠스 형제 이전까지 호민관은 귀족에게 조종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다 볼 수 없다" 였다.[1]
  2. 그러나 실제 공화정 중기의 드문 사료[2]를 검토하면, 호민관들의 활동이 원로원 의원들의 조종을 받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3. 원로원은 직접 법률을 제정하기는 불가능했으며, 호민관을 통하지 않으면 법률 제정 권한이 있는 민회에 법안을 제출하기도 불가능했다.
  4. 결론] 호민관의 활동은 원래 취지인 평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외에, 기존 관례를 지키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원로원과 민회(특히 평민만이 모이는 평민회 comitia plebis tributa)의 중개자로 국정을 원활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실 호민관 10명 중[3] 한 명만 독하게 맘을 먹으면 로마의 정치를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호민관에 손을 대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어 아무나 죽일 수 있었고, 집정관에게만 허용되었던 거부권(veto)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특정 사안에 끝까지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퇴임 전까지는 해당 사안이 제대로 제도권에서 다뤄지기는 불가능했죠.
  그러나 적어도 그라쿠스 형제 전까지는 호민관이 정치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까지는 정치 관례('mos maiorum')의 한도를 지킬 수 있었고, 평민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이 그 옹호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관례의 옹호자 역할에는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Publius Claudius Pulcher)가 카르타고에게 드레파나 해전(Battle of Drepana)에게 패하고 돌아오자 호민관에게 기소당해 엄청난 벌금을 물었습니다. 이유는 해전 직전 점을 칠 때 불경을 범했기 때문입니다[4].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가 안찰관으로 당선되자 호민관이 '최소 연령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효라 주장했습니다.
  •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너 로마에 도착한 후, 군사비를 얻기 위해 사투르누스 신전의 국고를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 때 '집정관만이 권한이 있다'고 가로막은 사람이 호민관이었습니다.[5]

  심지어 당시 최강의 군단들을 거느리고 로마로 돌아온 후의 절대 권력자 카이사르에게 호민관이 개긴 사례는 이뿐이 아닙니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일어나지 않아 분노를 사고 결국 암살에 가담한 BC 45년의 폰티우스 아퀼라(Pontius Aquila), 축제에서 카이사르를 환영하며 왕이라 칭한 일부 군중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한 BC 44년의 C. Epidius Marullus와 L. Caesetius Flavus가 있지요.[6]  이처럼 호민관들은 상당한 자율권을 갖고, 성문법이 없던 로마에서 관례를 존중해 법치의 연속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면 이렇던 호민관들이 왜 그라쿠스 형제 때부터 앞장서서 원로원과 충돌하고, 저명한 장군의 편에 서서 혼란을 가져온 정책을 주동했을까요?  이것은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가 아닙니다.  저자는 이 변화를 '호민관의 지위는 정치적 야심가 또는 정치적으로 무능한 원로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적 도구로 빠르게 전락하였다'고 말합니다.  호민관의 변화가 로마 사회의 변화로 평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는지, 아니면 단지 그라쿠스 형제가 개인적인 야심을 추구하면서 관례가 깨지고, 이것이 문제를 확대시켰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새로운 내용들과 논리는 인상적인데, 좀 아쉬운 점이라면 박사 논문을 기초로 하면서 '서적'의 형태로 충분히 다듬지 않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령 같은 에피소드의 인용이 여러 번 나온다든가.... 논문이라면 모르지만, 책이라면 보통 '앞 몇 page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만들었겠지요.
  덤으로,  한 가지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은 다음입니다.

  ... 토지 분배 요구가 비록 그라쿠스 형제 시대의 뜨거운 감자였다 하더라도, 공지 분배를 요구하는 공화정 초기의 호민관과 평민지도자의 노력을 모두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호민관의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지 분배를 위한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했다. 사료는 원로원이 다른 호민관의 비토권을 이용하여 [빈민에게 토지 분배를 제안한 호민관을] 좌절시켰다고 전하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이다. [각주 3; 호민관이 동료 호민관에게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p.274)

  ... 리비우스(Titus Livius)가 소개하고 있는 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따르면, 기원전 188년의 호민관 발레리우스 타포(C. Valerius Tappo)가 포르미아이(Formiae)를 위시한 세 자치시에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하셨다.  이에 법안이 '원로원의 의결' 없이 제안되었다는 이유에서 네 명의 동료 호민관이 비토권을 행사했다. (p.279)

  언뜻 보면 p.274와 p.279의 서술이 양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각주 3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을 맡은 BC 133년의 훨씬 이전인 BC 188년에 이미 호민관이 동료에게 비토를 행사한 기록이 있는데, 당연히 설명이 필요하겠죠.

  漁夫

[1] 잘 알려진 사례로, '로마인 이야기'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재판하는 주역은 호민관들이지만 실질적인 주도자는 대(大) 카토(Cato the elder)로 묘사합니다. 나무위키 호민관 항목에서도 "이렇듯 집정관과 맞먹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라쿠스 형제 이전까지는 호민관들의 권한 사용은 그다지 과감하지 않았다.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되는 심사를 받는데 원로원과 대립각을 세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라는 서술이 이런 시각을 암시합니다.
[2] 공화정 중기의 사료는 적은 편은 아니지만 호민관에 대해서는 언급이 적습니다. 정복 전쟁이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 같은 영웅들은 열심히 설명하지만, 호민관이나 안찰관(aedilis) 같은 군사적 권한이 없는 수수한 관직은 대부분의 저자가 별로 관심이 없죠.
[3] 처음 관직이 창설된 것은 소위 '성산 농성 사건'이 터진 BC 494년입니다. 당시는 아마 두 명이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늘어 공화정 후기에는 10명까지 늘었습니다.
[4] 성스러운 닭이 모이를 쪼아먹은 모양으로 점을 치는데 닭이 모이를 안 먹고 있자, "모이 먹기 싫으면 물이나 먹어라!"고 닭을 바다에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ㅋㅋㅋ
[5]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직접 국고로 가서 열었다고 하는데, 당시 법적으로 아직 속주 총독(proconsul) 이었던 카이사르는 소위 로마 시내(pomerium)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집정관은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와 함께 떠났는데, 직책상 로마를 떠날 수 없던 호민관은 꿋꿋하게 남아서 관례를 지키려 했다는 얘기죠.
[6] 이 둘은 카이사르에 의해 호민관 지위와 원로원 의원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카이사르는 이 때 호민관을 함부로 대한 것 때문에 현대까지 욕을 먹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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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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