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1/16
  (1편에서 이어집니다)
  큰 사건은 셋을 꼽을 수 있습니다.

  BC 54년 여름 폼페이우스의 부인 율리아(Julia)가 출산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부부는 무척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1] 삼두에게 이건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뒤에서 확인하겠지만, 결국 이 일은 내전의 가능성을 더 올리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다음에는 BC 53년 5월 크라수스가 카르하이(Carrhae)에서 파르티아에게 패해 죽습니다. 크라수스는 마음만 먹으면 나머지 '이두'의 대립을 조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내전의 위험 요소가 되었습니다. [2]
  마지막으로, BC 52년 1월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밀로가 이끈 폭력단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평민을 위한 정책을 여럿 입안해서 평민층에게 인기가 높은 그의 죽음에 격분한 사람들은 장례식 과정에서 원로원 의사당(Curia)을 불타게 만들었으며, 그 뒤에도 원로원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의 소요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로원은 최종 권고(자세한 설명은 앞 편을 참고하셔요)를 발했습니다. 이 상황을 처리할 사람으로 전직 집정관으로서 병력을 거느릴 자격이 있던 폼페이우스가 뽑힌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3],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뽑히는 관직은 원래는 독재관(dictator)이기 때문에 그의 직함이 '단독 집정관(consul solus)'인 것은 어딘가 이상하지요? 원로원파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였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Marcus Calpurnius Bibulus)가 굳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
 
  카이사르의 입장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으로 뽑힌 것까지는 상관이 없었고 실제로 동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차피 로마가 새 해가 되었는데도 집정관이 없었던 난장판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이 된 후 한 일 일부는 카이사르의 기대와는 반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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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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