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the Rubicon; '주사위는 던져졌다' (1)

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1/15
  고대 로마에서 1월 초에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율리우스 카이사르(IVLIVS CAESAR; Julius Caesar)의 루비콘 도하일 것입니다.

  BC 49년 1월 7일, 원로원은 호민관(tribunus plebi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등의 거부권(veto) 행사를 무시하고 현대의 계엄령과 비슷한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num)를 발했습니다. 전 해에 호민관으로서 카이사르를 크게 도왔고 12월부터는 원로원 의원이 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Caius Scribonius Curio), 현직 호민관인 안토니우스 및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Quintus Cassius Longinus)는 [1] 노예 복장으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 군에 합류해야 했습니다. 집정관(consul) 렌툴루스(Lucius Cornelius Lentulus Crus)가 호민관들에게 최종 권고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즉시 나가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결국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원로원파를 이겼으며, 비록 암살당했지만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1인 체제를 - 로마 제정 - 확립합니다.  따라서 루비콘 도하야말로 로마의 정치 체계를 결정적으로 제정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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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와 원로원이 결국 전쟁으로 치달은 과정 및 결과를 이해하려면, 그 몇 년 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Bello Gallico)을 치르고 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합니다.
  카이사르는 BC 59년 첫 집정관 시기, 당시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Cnaeus Pompeius Magnus)와 로마 최고의 부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2] 의 지원을 받아 - 통상 제 1차 삼두정치(the first triumviratus)라 부릅니다 - 소(小) 카토(Marcus Porcius Cato) 등 원로원의 보수파(optimates)에게 단단히 물을 먹였습니다. 그 후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plina), 나르보넨시스(Narbonensis 또는 Gallia Transalpina), 일리리아(Illyria)까지 세 개의 속주(provincia)를 맡아 군사를 거느리고 BC 58년부터 갈리아 전 영역의 제패를 위해 뛰고 있었지요. BC 59년 그가 현직 집정관일 때 정해진 속주 총독 임기는 5년, 즉 BC 58년 1월 1일부터 BC 54년 말일이었습니다. [3]

▼ 지도 1.  나르보넨시스와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갈리아 부족들의 거주 지역. 갈리아 전쟁 때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간 지역이다.
From Wikipedia Commons; https://en.wikipedia.org/wiki/Roman_Republican_governors_of_Gaul
   BC 58년부터 화려한 승리를 거두며 로마 시민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던 카이사르였지만, 그가 없던 동안 로마 정계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BC 58년 호민관으로 당선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Publius Clodius Pulcher)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은혜를 상당히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두의 이해에 걸맞게만 움직여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처럼 전형적인 민중파(populares)로 대중 지향 입법에 적극적이었으나 카이사르처럼 신중하지는 않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어 반대파에게 폭력도 불사했기 때문에 (당연히) 폭력단을 만든 반대파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Titus Annius Milo)와 맞붙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민회나 공직자 선거조차 제대로 못 열릴 정도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더군다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BC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 있으면서 자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정책을 모두 법제화했기 때문에, 삼두 체제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방책을 궁리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 지도 2.  키살피나 속주 전도 및 근처 갈리아 부족들의 거주 지역. 이탈리아 본국과 키살피나 속주의 경계에 있는 중요한 도시인 루카(Luca), 라베나(Ravenna), 아리미눔(Arimunum)의 위치.
  덤으로, 'Pennine Alps'를 '페니키아인(=카르타고인)'이 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리비우스가 주장한 이유를 알 수 있다(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III) - 어디로 넘었는가? (1) by 漁夫 - 얼룩소 alookso).
Wikipedia common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Placentia_(194_BC)
  카이사르는 속주 총독이었기 때문에,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정한 법에 따라 이탈리아 본국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 지도 2에 나온 키살피나 속주의 영역을 벗어나 로마 쪽으로는 총독직을 내려놓지 않는 한 들어갈 수가 없었지요. 그가 회담장으로 정한 곳이 루카(Luca; 현대의 Lucca)였고, BC 56년 초(아직 겨울이던 때. 당시 달력으로는 아마 4월 초) 셋은 만났습니다.
  여기서 삼두가 결정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BC 55년의 집정관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출마한다.
  •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전직 집정관(proconsul)으로서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에 위치한 2개의 속주, 크라수스는 시리아 속주를 받는다. 둘의 총독 임기는 모두 5년(BC 54~50)이다.
  • 카이사르의 임기는 여기 맞춰 5년 더 연장한다.

  세 번째 항목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데, 후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및 전후 처리를 완전히 마친 것은 실질적으로 BC 51년의 말에서 50년의 이른 겨울이었습니다. 그 동안 로마에서는 실로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요...

   === to be continued === 

[1]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Caius Cassius Longinus)의 형제 아니면 사촌
[2] 실제 폼페이우스가 더 부유했다는 의견도 있다. 풍요로운 지중해 동부 태반을 정복했기 때문.
[3] 12월 '31'일로 생각하면 안 맞을 수도 있다. 카이사르가 달력을 '율리우스력'으로 개혁한 것은 BC 45년 부근이기 때문이다. 임기 통례가 1년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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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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