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면식범이었다

루마
루마 · 사회언어학자
2023/04/04
이전 글: https://alook.so/posts/54t4zym 에 이어, 제가 겪은 피해가 대학 때 지인에 의한 '지인능욕' 범죄였음을 알게 된 뒤 가해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정에 대해 써내려 갑니다.
 

잡아야만 하는 이유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아니, 기가 막히다는 말로는 물론 부족했다. 
일 년 동안 애써 부정해왔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정말로 ‘지인’이 저지른 범죄였던 것이다. 

그놈이 내게 했던 짓에 같은 대학 지인이라는 사실을 입히고 나니, 피해 당시에 막연히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역겹고 분했다. 
게다가 우리 말고도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와 공포가 엄습했다.

이런 짓을 하는 가해자라고 하면 흔히들,
‘현실에서 연애도 못하고 여자에게 무시 받는 남자’ 혹은 ‘인생이 힘들어서 화풀이 할 만만한 상대를 찾는 못난 인간’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그런데 용의자로 좁혀진 삼십 명 남짓 중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연애도 하고 사회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피해자들은 그보다도 더 기라성 같은 능력과 직업을 갖춘 여성들이었고.

그말인즉, ‘이런 짓을 할 만 한 불쌍한 놈’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몇 년에 걸쳐 이런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인간도 겉으로는 완벽한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경악했던 사실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어떤 결과가 따를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고 피해자들에게 닿지만 않으면 언제까지나 들키지 않고 범죄를 계속할 수 있는데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친히' 연락을 했다는 점이다.

해외 VPN과 텔레그램이라는 몇 겹의 철옹성 속에서 전체공개 사진만 골라서 보내는 자신들의 치밀함을 이 범죄자들 스스로 얼마나 과신하고 있는지, 그리고 피해자를 직접 조롱하고 괴롭히는 데서 얼마나 희열을 얻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교만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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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 피해경험자로서, 가해자 처벌과 법/제도/인식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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