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
2023/05/07
유튜브를 통한 온라인 강연이긴 했지만 그날엔 왠지 대면 강연을 하는 것처럼 잘 차려입고 싶었다. 정장도 좋은 것으로 입었고 잘 신지 않던 구두를 신고 안경도 가장 아끼는 것으로 골랐다. 그 모든 것이 급성복통으로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느꼈던 통증과는 차원이 달라 호흡곤란과 어지럼증까지 동반했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같이 있었던 분이 나중에 증언하기로 얼굴에서 핏기가 다 빠져 정말 뱀파이어를 보는 듯했다고 한다. 
강연은 이미 물 건너갔다. 사람들은 나를 편안한 소파가 있는 작은 방으로 부축했다. 아는 사이였던 대표님도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 소파에 늘어진 채 땀을 흥건히 흘리며 백짓장 같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내 흉측한 몰골을 숨기고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행사를 망친 미안함과 창피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구급대원이 도착할 때까지 10여 분의 시간이 내게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력한 곳에서는 시간 간격이 팽창해 시간이 늦게 간다. 블랙홀의 경계면인 사건의 지평선에 다가갈수록 시간은 점점 느려진다. 소파에 늘어져 신음소리를 내며 구급대원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느낀 시간의 흐름이 꼭 그와 같았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강연을 시작했어야 할 시각에 나는 구급차에 누워 있었다. 그날 처음 만난 출판사의 마케팅 팀장이 내 짐을 들고 함께 탑승해 있었다. 나는 구급대원에게 그때의 증상과 함께 이전부터 있었던 복통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동네 내과에서 들은 대로 위경련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정확히 2주 전에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했던 사실도 알려주었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간 것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젊은 시절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어 함께 있던 친구들이 나를 구급차에 태워 응급실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구급차를 탔었다는 기억조차 없었다. 술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눈 떠 보니 응급실’인, 그런 드라마 같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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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물리학자입니다(jongphil7@gmail.com). 유튜브 채널 “이종필의 과학TV”(https://c11.kr/1baom)도 운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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