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용 꽃이 되길 거부한 기생 출신 열혈 독립운동가 - 정칠성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8/14
관상용 꽃이 되길 거부한 기생 출신 열혈 독립운동가, 정칠성.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국 독립과 여성 해방을 위한 가장 급진적인 변신, 정칠성(丁七星, 1897 ~ ?)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경험, 3.1 운동
   
‘3.1 만세 운동’은 실패한 거사였다. 3.1 운동은 기획 주체에서 행동 단위로 이어지는 치밀한 각본이 마련된 체계 잡힌 운동이 아니었다. 일제의 억압에 분노한 수많은 군중들이 저마다의 정념을 폭발시킨 ‘종잡을 수 없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고종의 인산(因山)을 애도하는 노인들과 국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고무된 학생들, 지주에게 고리를 뜯겨 화가 난 소작농,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 주재소의 일본 경찰에게 얻어맞은 무지렁이, 시끌벅적한 광장을 지나칠 수 없었던 혈기 왕성한 청년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중구난방’과 ‘좌충우돌’은 당연했다.

만세 운동은 결국 일제 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민족이 염원하던 독립을 얻어내지 못했고, 운동에 참여한 많은 조선인들은 고통스런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결과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3,1 운동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큰 좌절과 시련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고종의 인산이 겹치면서 3·1운동은 전 민족적 거사가 되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출처-중앙일보)
하지만 3.1 운동을 마냥 실패한 운동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중요한 사정이 있다. 만세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처지는 그 숫자만큼이나 제각각이었지만, 3월 1일은 그 다양한 에너지가 한데 모여 분기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날의 만세 사건은 실제적인 차원에서 우리나라 대중 ‘민주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고, ‘공화주의(共和主義)’를 향한 도저한 첫 발을 내딛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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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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