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 오상순 시비를 찾아서
2024/06/06
지난 3일은 공초 오상순 시인 기일이었다. 예전에 서울에 있는 시비들을 탐방하며 써 놓았던 글이 있어 올린다.
공초(空超)라는 호를 가지고 있던 오상순 시인. 아침에 깨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줄곧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심지어 한 손으로 세수를 하며 다른 한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는 식의 일화를 생각하면 공초에서 자연스럽게 꽁초나 골초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다가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한 뒤 전국의 명산과 명찰을 발길 닿는 대로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공초(空超)라는 호를 재미삼아 허투루 지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평생 자신의 집을 갖지 않았으며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을 정도로 모든 것을 비우고 살아간 삶을 생각하면 공초(空超)만큼 오상순 시인에게 잘 어울리는 호도 없다고 하겠다.
오상순 시인은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종교철학과를 나온 명민하고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유학을 다녀온 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를 하기도 하고, 한때는 기독교에 빠져 전도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정식 승려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불교를 통해 무소유, 무정처의 삶을 받아들였다고 이해하는 게 옳을 듯하다. 시인으로 나선 초기에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허무혼의 선언」과 같이 스케일이 큰 장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시마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로 여겼는지 시작 활동을 거의 접어버렸다.
그런 공초 오상순 시인이 묻혀 있다는 곳을 찾아간다. 수유역에서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거기가 빨래골이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맑고 깨끗해서 그 옛날 궁중의 무수리들이 모여 빨래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종점까지 가기 전에 수유1동 사무소가 있는 ‘빨래골 입구’ 정류장에 내리면 ‘공초 오상순 선생 묘소 가는 길’이라고 새긴 세로 모양의 돌기둥을 만날 수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귀를 접다> 등 몇 권의 시집을 냈으며, 에세이와 르포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의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국어사전을 볼 때마다 너무 많은 오류를 발견해서 그런 문제점을 비판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도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