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마지막이자 가장 완벽한 사랑 - 연재소설 <황혼의 불시착> 1회
2023/09/25
그 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공간에 모인 여러 사람들과 식사를 마쳤을 때,
방 한구석에 있는 향과 받침대가 보였다.
식후의 나른함 속에 맥락 없이 모여있는 사람들 틈으로
이걸 불 붙여보자며 그 받침대를 들고 가자,
그 가운데서 요즘 흔치않은,
담배 피는 남자 한 명이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향에 불을 켜줬다.
그 순간엔 몰랐다.
그것이 여자의 내면에서 오래전에 망가졌거나, 닳아버렸거나, 수명을 다하여서
불가역적으로 작동이 멈춘 줄 알았던
어떤 기능에 불이 켜진 시간이었다는 걸.
며칠이 지난 후, 그 기능이 켜졌다는 사실을 감지한 여자는 그 날 라이터를 꺼내 향에 불을 켜준 남자의 명함을 가방에서 찾아 꺼내 들여다봤다.
거기 적혀있는 남자의 직업, 직장, 주소 같은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오로지 전화번호였다.
이 전화번호가 열쇠가 되어 문을 열어줄 둘 사이의 공간에만 관심있었다.
문자든 카톡이든 텔레그렘이든 뭐가 됐든 그 공간에서 여자는 이십년만에 작동을 시작한 기능을 발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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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오진영tv 유튜브로 시사 평론을 쓰는 칼럼니스트. 포르투갈어권 문학 번역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 등 번역.
주옥같은 글을 공짜로 읽을 수 있게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오작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