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 읽는 겨울밤

박선욱 · 시, 동화, 소설 및 평전을 씁니다.
2023/04/03
서사시 읽는 겨울밤
   
   
곽효환
   
   
   
창밖 눈 가득한 겨울밤 서사시를 읽는다
지난 여름과 가을 무성했던 기억들은
어느새 까마득하고
은빛 노을이 일렁이던 샛강의 하구가 드러낸
시커먼 밑동 위로 눈 가득하다
나목들이 피워내는 흐드러진 눈꽃으로
가지가 휘청한데
   
서사시의 주인공들의 삶은 대개 비극이었다
사내는 일생을 방황하거나 눈멀고
몸뚱이와 마음이 피폐해진 채로 죽어갔다
더러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환영받기보다는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비루하게 생을 마감했다
여인들은 막연한 기대 속에
외롭고 쓸쓸하게 혹은 처연하게
오늘같이 눈이 푹푹 내리는 겨울밤에
누군가를 기다리다 시들어갔다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은 밤,
누군가를 기다린다
다시 눈 내리고 또 쌓이고
작은 어촌 마을 포구의 밤은 깊은데
지난 계절에 운명처럼 혹은 스칠 듯이 지나간
그녀의 얼굴도 이름도 희미하다
-순이였던가……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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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실천문학》 으로 등단.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눈물의 깊이》 《풍찬노숙》, 인물이야기 《윤이상》 《김득신》 《백석》 《백동수》 《황병기》 《나는 윤이상이다》 《나는 강감찬이다》 등.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으로 제3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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