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러려고 군인된 줄 아나.-어느 정보요원의 긴 생애 짧은 이야기 4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2/19
어느 정보요원의 긴 생애 짧은 이야기 4 – 내가 이러려고 군인되줄 아나 
   
늑막염은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피난살이하면서 어머니 지인의 도움도 받고, 나름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서 그런지 웬만큼 회복될 수 있었다. 바야흐로 장정(壯丁)이 될 나이였다. 대학 진학 아니면 군대를 가야 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병역 유예 특혜가 있었다. 그래서 사립대학에는 병역 기피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로부터 거의 7~8년 뒤인 1962년 사립대학 조사 결과 ‘대학생’이 정원의 175%에 달할 정도였으니 (한겨레 21 2002.10.9.) 얼마나 많은 ‘나이롱’ 대학생들이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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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공부했던 ‘조선신학교’의 후신인 한국신학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목사의 가업을 잇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아버지도 장남의 뜻을 밀어 주고자 하셨다. 어려운 살림에 등록금을 마련해 한국신학대학에 적을 두게 됐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당시 집을 옮기느라 전 재산을 탈탈 털어 현금으로 가지고 있던 어머니가 날치기를 당하는 황망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학비는 고사하고 온 집안이 쫄쫄 굶을 지경이었다. 신학대학생의 꿈은 일단 접어야 했고 대학 교문 아닌 훈련소 정문 문턱을 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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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군 훈련소
50년대 한국군의 현실은 정말 비참했다. 위에서 말한 대학생 징집 유예에서 보듯, 현역으로 끌려온 장정들은 대개 일자무식의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었다. 장교와 하사관들이 부식 빼돌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 항상 배는 고팠고 구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같겠지만 훈련소는 차라리 천국이었다. 자대배치 이후 ‘기라성같은’ 고참들의 횡포는 참으로 참아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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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예 빠지거나 일찌감치 편한 보직으로 빠지는 시대였기에 소대에 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중...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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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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