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과몰입하기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1/27
무슨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하는 것도 아주 실망하는 것도 어느 수준 이상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이라 요즈음 들어서는 그런 적이 그다지 없는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은 워낙 명작인 데다 심지어 취향에도 잘 맞는 작품이라 처음 봤을 때도 그 이후로도 세세한 표현 하나하나에 은근한 감동을 느끼게 되지만 그만한 작품을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고, 요즘은 대체로 재미있어도 머리로만 재미있네, 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렇게 만사에 무뎌져서야 누굴 감동시킬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무엇을 보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없어져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2주 전쯤에 실감했다. 왓챠에서 본 단편 드라마 ‘딱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 덕분이다. 한국 드라마를 좀처럼 보지 않는 내가 어쩌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가? 연초를 맞이하여 왓챠 구독을 중지할까말까 고민하며 구독을 지속할 이유를 찾아다니던 내게 추천 영상으로 이 작품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관계가 파탄난다는 얘기에 호감을 갖는 이상한 사람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틀어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제목에 잡혀있는 콘셉트 그대로 흘러간다. 교사인 여주인공은 회사 사장인 남주인공과 오래 사귀어 반쯤 같이 사는 듯한 모양으로 지내고 있는데, 시작되자마자 꼭 내키지만은 않는 성관계를 하더니, 이후엔 항상 그래왔듯 축구 경기를 보며 딱밤 내기를 한다. 이기는 쪽이 지는 쪽 이마를 딱밤으로 때리는 단순한 내기다. 어떻게 봐도 일이 즐겁게 잘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아니나다를까 남주인공이 내기에 이겨서 여주인공의 이마를 아주 강렬하게, 온힘을 다해서 때린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 것 같은 딱밤이다. 당연히 여주인공은 아픔과 짜증과 울분 따위를 느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남주인공은 별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여기까진 얄밉지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흔한 일상의 풍경이니까 여주인공도 다른 일이 없었다면 금방 기분을 풀고 돌아갔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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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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