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한국의 밥상 (5)-건축의 중심, 솥과 아궁이

우석영(동류실주인)
우석영(동류실주인) 인증된 계정 · 철학자. 비평가. 작가.
2023/10/17

그 시절, 돌봄 노동 공간의 중핵은 단연코 부엌(정지, 정짓간, 증지, 증짓간, 부엌, 부악, 벜, 비엌, 부식, 부섴, 부삽, 부수깨…)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네 할마씨들과 어무이들은 의자도 없이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숱한 돌봄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고행자처럼, 수행자처럼, 수도승처럼, 보살처럼. 

그 시절 우리는, 그 분들의 일터를 ‘정지’라 불렀다. 정지는 어두침침한 곳, 연금술이 일어나는 곳, 그러니까 노자老子가 말한 골짜기(谷)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조왕신竈王神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마술적이면서도 신적인 장소. 늘 어스름했고 그늘졌던. 

그곳의 문을 열면, 과연 뭔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법적이었던 물건은 큰 자라 등처럼 생긴, 거무튀튀한 색깔을 한 엄청나게 무거운 무쇠판이었다. 그걸 들어 올리면, 그 아래 모락모락 조그마한 구름처럼 올라오던 흰 김 아래에 보이던 놀라운 것들. 때로는 밥이었고 때로는 국이었고, 때로는 떡이었고, 때로는 옥수수였고, 때로는 고구마였던 것들. 그러니까 솥은 변주와 다산에 능했다. 솥은 자궁이었고, 풀무였고, 움푹 패인, 무한대로 뻗은 농토였다. 불사하는 곡신谷神(노자 6장)이 바로 거기 거주하고 있었다. 불이 달구면 언제라도 노동에 나서던 전사이던 솥! 그러나 일이 있든 없든 늘 무사태평하기만 하던 솥이어! 뭐든 척척 해낼 줄 알던, 이 세상의 걸물 중에서도 최고의 걸물인 솥이시어! 신神 그 자체이던 솥이시어! 

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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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철학. 탈성장 생태전환. 포스트휴먼 문학 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행동사전>(공저) <불타는 지구를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걸으면 해결된다>(공저) <숲의 즐거움> <동물 미술관> <철학이 있는 도시> <낱말의 우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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