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다리

박선욱 · 시, 동화, 소설 및 평전을 씁니다.
2023/02/11
◆ 콩트 ◆
   
외나무다리
   
   
박선욱
   
   
사람살이라는 게 다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오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꾸만 실소가 터져나오려는 걸 어쩔 수 없다. 평소에 늘 명문 A대학 나온 걸 뻐기면서 목에 힘을 뻣뻣이 주던 허 사장이 시든 무말랭이마냥 고개를 푹 꺾어 버릴 일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이야기의 밑그림은 아무래도 점심 시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침묵은 금이야.”
동숭동 로터리의 붉은 벽돌 건물 3층에 자리잡은 지평출판사 사무실에서 허 사장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화두 삼아 던지며 한자락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직원들을 데리고 근처 설렁탕집에서 점심을 먹고 온 뒤라 모두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직원들이라야 편집부 과장 하나와 편집사원 하나, 경리 아가씨와 영업부원 한 명이 고작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이야, 바위만 한 금덩이가 우리집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셨는데, 그게 바로 내가 태어날 태몽이었다는 거야. 꿈에 금을 모았으니 필시 일국의 재상감인데, 이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해서 참 진(眞)자를 쓰셨다는 거야. 어쨌든 내가 A대학을 나오게 되고 출판사 사장을 하고 있는 건 순전히 할아버지의 성명 철학 덕분인 것 같아. 안 그래, 김 과장?”
유리창 문으로 바라다보이는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나무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책상 위로 실려 오는 엷은 햇살 위에 담배 연기를 길게 토해 놓던 김 과장이 갑작스런 허 사장의 물음에 눈망울을 크게 떴다. 허 사장은 마침 코를 후비던 새끼 손가락을 엄지 손가락으로 튕겨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경리과의 미수 주가 눈살을 찌푸린 채 얼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글씨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참으로 침묵하지 않는 시상에 대해 조부님이 슬퍼하실 것만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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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실천문학》 으로 등단.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눈물의 깊이》 《풍찬노숙》, 인물이야기 《윤이상》 《김득신》 《백석》 《백동수》 《황병기》 《나는 윤이상이다》 《나는 강감찬이다》 등.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으로 제3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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