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레터

“‘Black’ 말고, ‘African American’이라고 불러주겠니.” 미국 군도에서 살다 왔다던 친구는 차분하게 대꾸했습니다. 왜 화를 내지 않느냐고 물으니 동유럽인은 영어에 서투르니 실수했을 거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들에 친구는 무심히 그러나 분명하게 답했습니다. 머릿속 생각이 영어로 곧바로 나오지 않아서, 저도 비슷한 잘못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속한 집단을 ‘gay’라고 불렀을 때 친구는 ‘lesbian’이라고 정정했습니다.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일은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나중에는 우스꽝스러우니까요.

 

친구와 다르게, 저는 낯선 상황에서 스스로를 애써 설명하는 걸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환학생 자격으로 처음 네덜란드에 갔을 때 이름부터 바꿨습니다. 외국인은 제 한글 이름에 들어 있는 기역 받침을 잘 발음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 자리에서 애써 정정하는 게 민망할 것 같아서 차라리 영어 이름인 ‘Eva’로 불러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제 정체성을 변호해야 할 상황은 계속 생겼습니다. 반 학생들이 여성의 날을 공개적으로 조롱할 때, 행인이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며 집요하게 저를 따라올 때가 그랬습니다.

 

매번 화를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표정으로 무감하게 지내는 사람이므로 나 자신을 증명해내는 일이 시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저만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피로감을 겪어내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소음을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준석 당대표가 개인 SNS를 통해 장애인의 삶을 거친 단어로 요약한 이후, 장애인은 시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