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3
2022/12/04
4.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명제는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노조는 폭력적인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폭력성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노조가 비폭력적으로만 활동해도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날이 온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회는 약자의 폭력성에 유독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약자의 저항적 행위의 여파가 시민에게 미치는 경우 더더욱 단호해집니다.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대체로 ‘취지는 옳더라도 방식이 옳지 않다’ 즉,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압축됩니다.
이 명제에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 옳은 문장이니까요. 그러나 그 명제가 사용되는 맥락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폭력부터 순차적으로 법과 제도에 의해 규제되고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범위에 추가되고 있습니다. 해외 여러 매체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가스라이팅’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폭력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면 인류의 과제는 폭력의 고리, 그 ...
김도훈님과의 토론은 이번에도 참 즐겁습니다. 제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저를 당혹스럽고 설레게 하시는군요.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김도훈님과 안망치님께 참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곧 올라올 마지막 글이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노조와 노조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중심으로 설명드렸다면, 마지막 글은 노조가 가진 근원적 한계들, 불합리성들을 풀어보려 합니다. 이어서 논의해나가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노조원이나, 노동자로써 겪지 못한 이야기들이기에, 완벽한 공감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조의 측에도 합리성이 있군요. 어쩔 수 없는 투쟁...에 따른 폭력은 사실 여전히 공감가진 않습니다. 폭력의 재생산은 도덕적이지 못하니까요. 니가 그랬으니, 나도 그러겠다는 결국 피장파장의 오류입니다.
다만 폭력의 근원적인 이유로 들어가자면, 웅보님의 말은 설득력있는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들이 잔재해있으니까, 그들의 폭력은 정당화될 순 없지만 이해가능의 영역은 될 수 있겠네요. 노조는 삶의 문제니까요.
이 부분에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평소에 노조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원인에 관한 질문을요.
현대차노조, 귀족노조하면 아주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노조죠. 그들이 이기심으로 일으킨 일들은 수없이도 많습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회사 구조에 변화, 그로 인한 비정규직 및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일자리 박탈.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2/2002/03/005100032200203251823004.html
과거, 1998년 파업에 동참한 직원식단의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당하자,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듯 말이죠. 이는 독립영화 '밥, 꽃, 양'으로도 다뤄져 있는 내용이죠.
현대자동차노조는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산하의 노조입니다. 이것이 노조가 말하는 정의인가요? 아니면 이건 단순히 노조라는 집단의 실수라 치부해야할까요?
앞선 글에서 언급하셨던 화물연대의 기괴한 원가절감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문제가 삶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파업은 절절하죠. 그들의 폭력은 기업과 국가가 조장한 구조적 폭력에 다른 대안이 없어서 저지른 폭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묻고 싶습니다. 노조의 모든 투쟁이 절절한 삶의 투쟁이라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웅보님의 전체적인 글의 스탠스는 '민주노총은 피해자'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근원적인 폭력의 구조가 기업이니까, 그들이 행하는 폭력은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현대차노조가 했던 폭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얼버무릴 수 있는 종류의 것 일까요? 그들이 외면했던 여성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것' 인가요?
이익집단인 '민주 노총' 에 속한 모든 노조가 '삶을 위한 투쟁'을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부가 그렇다고해도, 모두 그렇진 않죠. 그들에 대한 비판이 근원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기심에 연대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죠.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김도훈님 // 댓글 감사합니다. 뭐라 말씀 드릴 것도 없이 김도훈님의 글에 이미 답이 있어 그 부분 옮겨 적고자 합니다.
1.
'파업이 의미 있으려면, 회사의 특정 행위가 완전히 정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노조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대체하면 파업은 힘을 잃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그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차 등에 사보타주를 가한 것'
네 정확합니다. 누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있는가, 얼마나 벼랑에 가까워야 그들의 폭력이 저항으로 정당화 되는가는 다소 애매한 논의입니다.
제가 겪어본 바, 폭력적 해결방식을 더 우선적으로 선호하거나 고려하는 노조는 없습니다. 누가 더 나은 대안을 두고도 구속과 처벌, 상해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뭐,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행동부터 나선 것이 잘못이라면, 그럴 시간과 자원이 충분치 않았다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네요.
2.
언더도그마의 가장 큰 문제는 언급드렸듯이 다른 모든 폭력들을 동일선상에서 도매급으로 처리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국토부와 기업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하청, 재하청,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가시적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왔습니다.
현 화물파업이나 SPC 사태 외에도 대체 노동자에 대한 노조의 견제는 많이 있었습니다. 애당초 법은 파업의 효과를 저해시키기 위한 대체 인력 투입을 금지했습니다만, 최근 몇 년에 걸쳐 이루어진 법의 개악, 지속적인 꼼수로 법을 회피하며 파업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닌, 국가와 기업이 명백히 노동자 간 갈등을 조장한 것입니다. 전제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후속적 폭력만을 지적하는 것은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신 흑인시위의 폭력성처럼 노동자들의 폭력성이 저항을 넘어 분노표출의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노의 원인부터 살펴야 합니다. 분노를 억누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만 행동하라고 강제하면 화병밖에 더 날까요.
저도 정말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요. 저 폭력은 대상 뿐 아니라 당사자도 아프게 하거든요. 그렇게 점점 폭력성에 물들어 병들어가면서도 그 아픔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듯이 겉에 드러난 폭력을 중지한다고 해서 폭력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원인이 된 폭력을 제거해야 비로소 그 고리가 끊어집니다.
4.
사회 개혁을 외치는 집단은 폭력적이면 안되는건가요? 그럼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폭력적이어도 되나요? 폭력은 보편적인 선에서 부정되어야 하지만, 현실적 측면에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집단의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5.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폭력행위에 대해 나무라지 않는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나 마저 내 가족을 탓하고 등질 수는 없으니까요. 여론 좀 무마하자고 민주노총이 나서서 사과한다? 그 행위의 의미가 그렇게 대단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미 민주노총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는 굳어져 있으니까요.
더불어, 민주노총도 여기에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이지요. 그런데 그 대안 누가 가지고 있는지 정말 찾아서 받아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이 글에 바로 답장 드리고 싶어서 댓글 남깁니다.
1) 제목부터 약간의 왜곡이 있습니다. 전 결코 노조원,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정당화한 적 없습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관해서는 상당부분 인정합니다. 전 신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시장주의자라고 하면 될까요? 하지만 노조의 필요성은 공감하는바입니다. 일반적이 통념과 다르게, 노조는 신자유주의에 어긋나지 않거든요. 정부주체가 개입하는 게 아니고, 노동자들이 개입해서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억압을 받았다고 느꼈다면, 투쟁을 하는 것은 정당한 이야기죠. 어째서 그들의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이 받은 억압을 정당화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2) 언더도그마에 대한 오해
단어는 미국의 극보수주의자가 만들어낸 단어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었다고 그 단어의 뜻이 극보수주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죠.
'약자가 선 강자가 악 일 것이라는 착각'
이것이 과연, 약자들을 억압하는 것에 일조하는 논리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은연중에 가질수도 있는 선입견을 일깨워주는 아포리즘일까요?
폭력은 폭력일 뿐 입니다. 내가 맞았기에, 나도 때린다는 개념은 다르죠. 팔레스타인의 경우와도 다릅니다. 그들의 폭력은 정말 벼랑 끝에 매달린 이들이고, 다른 방법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지금의 노총은 그들의 경우와는 정말다릅니다.
그들이 폭력을 쓰지 않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다르게요. 단순히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그들이 얼마나 억압받아왔는지에 대해 말하며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2) 폭력의 재생산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개혁을 외치는 집단이 폭력이라뇨?
현재 진형형인 'Black Lives Matter'의 일부 폭력적인 행위들을 아십니까? 그들이 상가를 약탈하고, 아시아 인들을 폭행하는 것. 그것들은 억압에 대한 투쟁보다는 억압으로 인한 분노의 표출 및 폭력의 재생산에 가깝죠.
제가 쓴 본문에서는 파리바게트 파업당시 비노조원 기사원을 폭행한 민노총 노조원에 대해 다뤘습니다. 이게 정당한 폭력이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묻고싶습니다. 단순히 일부 조직원들의 행태라고 보기에는 전국적으로 비노조원 기사님들의 차의 배관을 자르는 등의 사보타주가 일어났습니다. 민노총은 아무런 징계도, 답변도 하지 않았죠.
SPC삼립의 비극적인 사건 정도나 되어야 사람들에게 공론화되고 사회의 개혁을 불러옵니다. 정말 슬픈 일이죠. 하지만, 비폭력 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들이 존재합니다. 진정으로 사회 개혁을 원하면 폭력을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그 가치가 퇴색되기 마련이죠.
그들의 받은 비가시적, 선제적 폭력은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동자인 적이 있고, 수많은 뉴스기사, 사건들로 그것들에 대해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민노총이의 폭력적인 행동들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일도 아니고, 사회의 개혁을 외치는 '집단' 수준에서의 폭력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죠.
4) 표현들의 애매함
...............
‘얌전히, 조용히 항의하라’고 하는 것은 되려 원인이 되는 폭력에 대한 정당화이자, 더 큰 폭력을 눈앞에 두고 침묵, 동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
얌전히, 조용히라는 표현된 단어가 많은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이네요. 어느 정도가 얌전하고 조용한 것일까요?
폭력이 없고,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횡단하는 것. 이건 어떤가요? 이건 폭력적인 시위가 아니죠. 그럼 이 경우는 얌전하고 조용한가요? 아뇨. 얌전하지도, 조용하지도 않죠.
폭력을 뺀다고, '얌전한', '조용한' 시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큰 목소리로 구호를 위치며, 긴 행렬로 행진을 이루면 폭력은 쓰지 않았지만 충분히 강한 메시지죠. 이 문장은 내가 당했으니까 그걸 말미암아 행하는 폭력에 대한 정당화 아닐까요?
......................
그러한 폭력들은 어떤 식으로든 질타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노조가 ‘깡패집단’으로 분류되어도 좋을지는 의문입니다.
.....................
당연히 아닙니다. 노조의 모두가 그렇진 않겠죠. 앞서 언급한, 제 글에서도 언급한 비노조원이 파업에 거슬리니까 폭행하는 경우, 이런 방향성 잃은 폭력들의 사건이 한 둘이 아닙니다. 민노총은 그것에 대한 입장과 징계 표명을 전혀 하지 않았죠. 왜요? 그 사건들은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이었을 뿐이니까요.
집단은 그 구성원이 한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단순한 집단도 아니고, 이익집단이죠. 거기다 구성원의 잘못한 사건을 정당히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아무런 입장표명도, 징계 선언도 없었죠. 이건 뭐라 해석해야할까요?
제가 보기엔, 그들의 폭력 행위가 그들에게 도움되기에 외면하는 것 뿐입니다. 파업이 의미 있으려면, 회사의 특정 행위가 완전히 정지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비노조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대체하면 파업은 힘을 잃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그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차 등에 사보타주를 가한 것 뿐입니다. 민노총이 여기에 책임이 없을까요?
전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당연히 공감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노조원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폭력을 싫어하셨습니다. 노조의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죠. 하지만 '집단'이 되면, 그 책임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폭력없이 해결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변에서 본 쟁의행위들은 폭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만 제 글의 의도자체가 '언론에 보도되는 민노총의 과격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에서 글을 쓰다보면, 그들의 과격행위들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관점에서 이런 글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과 내용, 어쩌면 놓치기 쉬운 부분들에 대한 언급에 감사드립니다.
오.. 마지막 글이 남아있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김도훈님과의 토론은 이번에도 참 즐겁습니다. 제가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저를 당혹스럽고 설레게 하시는군요.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김도훈님과 안망치님께 참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곧 올라올 마지막 글이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노조와 노조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중심으로 설명드렸다면, 마지막 글은 노조가 가진 근원적 한계들, 불합리성들을 풀어보려 합니다. 이어서 논의해나가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노조원이나, 노동자로써 겪지 못한 이야기들이기에, 완벽한 공감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조의 측에도 합리성이 있군요. 어쩔 수 없는 투쟁...에 따른 폭력은 사실 여전히 공감가진 않습니다. 폭력의 재생산은 도덕적이지 못하니까요. 니가 그랬으니, 나도 그러겠다는 결국 피장파장의 오류입니다.
다만 폭력의 근원적인 이유로 들어가자면, 웅보님의 말은 설득력있는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들이 잔재해있으니까, 그들의 폭력은 정당화될 순 없지만 이해가능의 영역은 될 수 있겠네요. 노조는 삶의 문제니까요.
이 부분에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평소에 노조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원인에 관한 질문을요.
현대차노조, 귀족노조하면 아주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노조죠. 그들이 이기심으로 일으킨 일들은 수없이도 많습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회사 구조에 변화, 그로 인한 비정규직 및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일자리 박탈.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2/2002/03/005100032200203251823004.html
과거, 1998년 파업에 동참한 직원식단의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당하자,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듯 말이죠. 이는 독립영화 '밥, 꽃, 양'으로도 다뤄져 있는 내용이죠.
현대자동차노조는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산하의 노조입니다. 이것이 노조가 말하는 정의인가요? 아니면 이건 단순히 노조라는 집단의 실수라 치부해야할까요?
앞선 글에서 언급하셨던 화물연대의 기괴한 원가절감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의 문제가 삶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파업은 절절하죠. 그들의 폭력은 기업과 국가가 조장한 구조적 폭력에 다른 대안이 없어서 저지른 폭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묻고 싶습니다. 노조의 모든 투쟁이 절절한 삶의 투쟁이라 생각하시는 것인가요?
웅보님의 전체적인 글의 스탠스는 '민주노총은 피해자'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근원적인 폭력의 구조가 기업이니까, 그들이 행하는 폭력은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현대차노조가 했던 폭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얼버무릴 수 있는 종류의 것 일까요? 그들이 외면했던 여성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것' 인가요?
이익집단인 '민주 노총' 에 속한 모든 노조가 '삶을 위한 투쟁'을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부가 그렇다고해도, 모두 그렇진 않죠. 그들에 대한 비판이 근원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근원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기심에 연대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죠.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김도훈님 // 댓글 감사합니다. 뭐라 말씀 드릴 것도 없이 김도훈님의 글에 이미 답이 있어 그 부분 옮겨 적고자 합니다.
1.
'파업이 의미 있으려면, 회사의 특정 행위가 완전히 정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노조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대체하면 파업은 힘을 잃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그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차 등에 사보타주를 가한 것'
네 정확합니다. 누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있는가, 얼마나 벼랑에 가까워야 그들의 폭력이 저항으로 정당화 되는가는 다소 애매한 논의입니다.
제가 겪어본 바, 폭력적 해결방식을 더 우선적으로 선호하거나 고려하는 노조는 없습니다. 누가 더 나은 대안을 두고도 구속과 처벌, 상해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뭐,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행동부터 나선 것이 잘못이라면, 그럴 시간과 자원이 충분치 않았다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네요.
2.
언더도그마의 가장 큰 문제는 언급드렸듯이 다른 모든 폭력들을 동일선상에서 도매급으로 처리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국토부와 기업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하청, 재하청,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비가시적 폭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왔습니다.
현 화물파업이나 SPC 사태 외에도 대체 노동자에 대한 노조의 견제는 많이 있었습니다. 애당초 법은 파업의 효과를 저해시키기 위한 대체 인력 투입을 금지했습니다만, 최근 몇 년에 걸쳐 이루어진 법의 개악, 지속적인 꼼수로 법을 회피하며 파업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닌, 국가와 기업이 명백히 노동자 간 갈등을 조장한 것입니다. 전제적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후속적 폭력만을 지적하는 것은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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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신 흑인시위의 폭력성처럼 노동자들의 폭력성이 저항을 넘어 분노표출의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노의 원인부터 살펴야 합니다. 분노를 억누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만 행동하라고 강제하면 화병밖에 더 날까요.
저도 정말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요. 저 폭력은 대상 뿐 아니라 당사자도 아프게 하거든요. 그렇게 점점 폭력성에 물들어 병들어가면서도 그 아픔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듯이 겉에 드러난 폭력을 중지한다고 해서 폭력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원인이 된 폭력을 제거해야 비로소 그 고리가 끊어집니다.
4.
사회 개혁을 외치는 집단은 폭력적이면 안되는건가요? 그럼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폭력적이어도 되나요? 폭력은 보편적인 선에서 부정되어야 하지만, 현실적 측면에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집단의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5.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폭력행위에 대해 나무라지 않는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나 마저 내 가족을 탓하고 등질 수는 없으니까요. 여론 좀 무마하자고 민주노총이 나서서 사과한다? 그 행위의 의미가 그렇게 대단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미 민주노총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는 굳어져 있으니까요.
더불어, 민주노총도 여기에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이지요. 그런데 그 대안 누가 가지고 있는지 정말 찾아서 받아보고 싶네요.
오.. 마지막 글이 남아있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