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는 팔아 치우면 안되는데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12/03


조기 교육의 광풍이 한국을 지배하기 전에 태어나기도 했고 부모님도 일찍부터 내게 본격적인 선행학습을 시킬 생각은 없었던 터라, 나는 영어 회화 같은 실용적 학문 대신 악기를 많이 배우고 자랐다. 피아노는 물론이고 하모니카도 배우고 단소도 배웠다. 피아노를 제외하면 학원을 잘 찾아보기 어려운 악기들인데, 이것들을 배운 이유로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했다. 지역 청소년 교육 센터 같은 곳에서 아주 싸게 가르쳤고 악기마저 저렴했으니 악기를 배운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악기라는 게 그냥 그렇게 배우기만 해서 익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고등학교 때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때쯤엔 이미 돈을 내고 배운 모든 악기의 연주법을 모조리 잊어버렸는데, 어이 없게도 누구 하나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은 기타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유도 터무니 없었다. 친척이 이삿짐 처리 비슷한 작업을 하다 얻어온 물건이 집에 굴러들어왔고, 짐으로 그냥 놔두느니 음계만이라도 익혀두면 어떨까 싶어 독학을 시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칠 수 있게 된 곡이 ‘사랑으로’였다. 친다고 해봤자 고작 단음으로 멜로디만 치는 것이라 기타 연주라고는 도저히 주장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심지어 친구에게 놀림까지 받았지만, 어쨌든간에 한 곡을 스스로 익혀 친 것이라 다음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어주긴 했다. 다음으로 익힌 곡이 영화 ‘쉬리’의 엔딩곡으로 유명한 ‘When I dream’이었을 것이다. 인터넷 카페 따위에서 쉬운 곡을 찾다가 이 곡이 제법 쉬운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환호작약하며 익힐 수 있었다.

이때 결정적으로 깨달은 것이, 누구에게든 악기 연주를 가르치기 이전에 음악을 사랑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좋아하는 곡을 멋지게 연주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친다는 것은 시간낭비를 넘어서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책을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독후감을 쓰라고 시키는 것, 또는 산...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135
팔로워 23
팔로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