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의 낙원을 떠나며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11/24


하이파이라 부르는 고성능 오디오 장비에 빠지면 돈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얘기가 취미와 비용 얘기만 나오면 빠지지 않는데, 나도 이런 무서운 길에 매료된 적이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CDP라는 고대의 문명을 향유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학창 시절이다. 그때는 ‘스마트폰’ 이라는 만능의 디지털 기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울 일이었나 싶은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3.5파이 이어폰 단자조차 탑재되지 않았으니 다른 문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벨소리가 16비트인가 32비트인가로 나온다고, 진짜 음악 소리 같다며 입을 벌리고 감탄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아니, 엊그제는 너무하고, 한 10년 전쯤 일어난 일 같다.

제법 대중적으로 보급된 디지털 기기가 그 모양이었던지라 음악을 향유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기기가 각축전을 벌인 기간이 3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전쟁은 CDP가 전통의 강자로 군림하던 판세를 MP3P가 뒤집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제3세력으로 MD가 자기 나름대로 마니악한 영역을 구축했다. 이때 나는 어쩐지 MP3P가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CD에 오래도록 천착했다. 다른 것보다 집에 이미 오디오를 두고 있어서 CD로 음악을 듣는 게 당연했다는 이유가 컸던 것 같다. CD 음원을 MP3P로 들으려면 음악을 컴퓨터로 추출해서 파일을 새로 만들어 넣든지 음원을 다시 다운받아서 넣어야 한다는 게 귀찮다는 점도 있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보유하지 않은 음원을 다운받아서 CD로 굽고 앨범 표지까지 인쇄해 꽂아두곤 했으니,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음악을 ‘음반’으로 듣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서론이 길어지는군. 아무튼 CD를 고수하는 음반 원리주의자들은 음반을 책 빌려주듯 서로 빌려주고 들어보고 감상을 나누는 미풍양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일을 복제해서 이메일로 보내줘도 똑같이 음악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음반을 직접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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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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