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를 생각하며
2023/03/24
공기를 들이마시고 목마를 때 물 들이키듯 자연스러운 일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영위하고 있는 글쓰기도 그랬다. 거의 100% 한글로 자판을 두드리고 글을 써내는 것이 숨쉬듯 자유롭지만 두어 세대 전만 해도 사정은 좀 달랐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고 신문의 가로쓰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모든 신문은 세로쓰기였고, 신문 기사에는 한문이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은 가로쓰기였지만 ‘어른들’이 읽는 책은 세로쓰기가 원칙이었고 하다못해 만화방의 무협지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형식이었다. 이 완고한 문자생활이 오늘날처럼 변화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이 가운데 1970년 3월 23일 별세한 외솔 최현배의 이름은 유독 크고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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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사진 가운데 웃고 있는 모습은 거의 하나도 없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그리고 한눈에 보아도 대꼬챙이같은 선비 인상이다. 그 후학들은 주변에서 ‘외솔’이나 ‘최현배’의 이름이 들리면 화들짝 자세를 바로잡을 정도였다니 어지간히 엄하고 어려운 스승이었다 싶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할 때에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매질을 감당하는 결기였다니 오죽했을까마는.
일흔 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외마디 유언은 ‘한글을!’이었다고 한다. 십대의 나이에 한힌샘 주시경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이래 그의 평생은 조선말과 그를 적는 글, 스승 주시경이 작명한 ‘한글’이었다. 1932년 일제 강점기 경성의 한 식당 주인은 식당을 찾은 명망가나 학자들의 짤막한 단상을 적은 방명록을 만들었는데 나이 마흔의 최현배는 여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글이 목숨 최현배” 밥 먹으러 와서 주인이 내미는 식당 방명록에서까지 이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인물이라면 술친구로 어울리기엔 참 피곤할 성 싶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역사의 발전과 변화에는 매우 유익한 법...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진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성욱 그래도 ㅎㅎㅎㅎ 챙기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하는데... 쩝
외솔관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반가운 마음에 정독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피가 섞인 친척끼리도 챙기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답니다. 후후후.
재수생 사촌에게 안부전화 한번 넣었다가 생각이 없는 놈이라고 욕 처먹은 기억이 나네요.
6개월에 한번 정도나 해보았을 뿐인데 참 너무하더라구요. 하하하.
@진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성욱 그래도 ㅎㅎㅎㅎ 챙기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하는데... 쩝
외솔관을 드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반가운 마음에 정독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