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잡지, 무거운 잡지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2/23
잡지를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병원에서 순번을 기다릴 때는 잡지가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고 또 매혹적일 수가 없어서 꼭 인테리어 잡지 따위를 뒤적이는데, 신기하게도 보고 나면 뭘 봤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재미난 것들로 눈요기를 한 기분이 남을 뿐이다. 내가 너무 머리를 비우고 사는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게 바로 잡지의 본분인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비우고 봐도 될 만큼 무난하고 재미있을 것. 하기야 잡지가 바로 스낵컬처의 원류 같은 것니까 그럴 만하다.

두 번째로 잡지에 손이 가는 곳은 비행기나 열차다. 잡지보다는 카탈로그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느낌은 대체로 비슷하다. 오, 이 시계를 이 값에? 이 선글라스는 좀 괜찮은데?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책자를 뒤적이자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특히 카탈로그의 좋은 점은 살 돈이 있든 없든 ‘한정 상품인데 질러보면 안 될까?’ 하는 욕구를 살살 자극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소유욕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포르노인 셈인데, 오로지 기내에서만 강렬한 생명력을 갖기에 그 재미는 아주 각별하다. 같은 것을 우리집 화장실에서 봐도 별로 재미있지 않겠지.

내가 잡지를 언제부터 좋아했는가 따져보면 어린 시절에 과학소년을 재미있게 봤던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아동용 전집류가 몇 질 있는 게 교육이나 교양의 척도 비슷한 역할을 했기에 우리집도 과학 전집이 제법 되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과학소년도 구독했던 것이다. 그래서 워낙 어릴 때 각인된 탓인지 지금도 과학소년이야말로 잡지의 이상향에 가깝다는 인식이 있다. 놀라운 과학 소식도 있고, 특집 기사도 있고, 만화도 있고, 게임북 같은 부분이나 퀴즈 따위도 있고, 독자 참여 코너는 물론이고 뭔가 만들 수 있는 창작 키트나 사은품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질릴 틈이 없는 종합 선물 세트나 다름없었다. 이사 다니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주로 만화)만 잘라내고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도 갖고 있었으면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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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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