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내성적인*

적적(笛跡)
적적(笛跡) · 피리흔적
2024/05/01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더 정확한 기억으론 지난 겨울밤이 길어져 같은 시간임에도 해가 떠오를 기색도 없을 때를 마지막으로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큰길로 나서자 아침 교대근무를 기다리던 불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가로등이 퇴근합니다.
   
가로등은 지친 몸으로 버스 창가에 이마를 대고 달아오른 눈꺼풀을 차가운 풍경으로 식혀가며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리며 나는 소리를 듣고 신발을 벗은 채 가만히 현관 앞에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으로 이제 자리를 쭈욱 펴고 한낮 동안의 휴식을 꿈꾸며 발을 미지근한 물로 씻고 마른 수건으로 젖은 발을 말린 뒤 밤새 기다린 고양이를 안아 등줄기를 어루만질 것입니다. 그렇게 누운 침대 위에서 피곤은 좀처럼 쉽게 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난밤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한 사내가 한 여자의 손을 잡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 하고 남자가 재차 여자의 팔을 붙들고 여자를 품에 안습니다. 여자는 팔을 내려 뜨려 품에 안겼다가 다시 품을 떠나고 남자가 다시 멀어져 가는 여자를 따라갑니다. 앞서가던 여자가 뒤따르는 남자가 지쳐가지 않도록 발걸음을 느리게 옮겨갑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남자는 여자의 귀에 속삭입니다. 
   
가로등은 가로등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기며 잠이 듭니다.
   
오월의 첫날이라고 쓰고…. 한참 동안 다음 문장을 기다리며 심장처럼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입력되지 못한 말들이 망설이며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거나, 다음 신호를 기다리거나, 또 다른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침이 오는 줄도 서늘한 바람이 씽씽 부는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이제 봄도 지나고 있으므로 다른 별에서 온 고양이 모란이 좋아라 하는 바깥공기를 맡게 해주려고 창문을 반쯤 열어두고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건…. 마지막으로 창문을 닫고 거실 불을 끄고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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