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가해자
2024/03/28
이십대 초입이었으니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영화 서클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그렇다고 친목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단단하지 않은 결속력으로 뭉친 영화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네마떼끄에서 오고가다 만난 사이였는데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남성 두 명과 여성 두 명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는데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는 감상한 영화에 대한 리뷰와 각자 맡은 분야의 꼭지 글을 모아서 팸플릿(신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닌 회지라 해 두자)을 발행했다. 이 모든 일은 인쇄소 직원으로 일하는 회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모임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이 모임의 창립자이자 든든한 스폰서였다. 매달 우편으로 발송되는 팸플릿을 집에서 받아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연애 편지를 쓰듯 열심히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는데 평소 활발하고 씩씩했던 여성 회원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면서 모니터를 내동댕이치는 일이 발생했다. 쓰러진 모니터 옆에서 여자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때 상영된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그때 일어난 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추론하건대, 영화 속 장면 하나는 그녀가 그토록 감추려고 했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리라. 공교롭게도 영화 속 장소가, 공교롭게도 영화 속 악당의 얼굴이, 공교롭게도 영화 속 강간 피해 여성이 입은 옷이, 공교롭게도, 공교롭게도,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녀의 신경 쇠약과 히스테릭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레짐작으로 알 수는 있었다. 폭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살구꽃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상황적 동물, 수긍이 가긴 하지만 그 애인은 뺨을 두 번이나 맞은 거네요. ㅜ
악담님 왜 그러셨어요 네? 왜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