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문구점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6/02



학용품을 이것저것 많이 사용하던 학생 때는 오래도록 문방구 구경을 하곤 했다. 항상 쓰는 물건이니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탓이리라. 고등학생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제법 커다란 필통에 색색깔의 볼펜, 형광펜, 색연필, 수정테이프, 칼, 드라이버 따위를 서바이벌 장비처럼 종류별로 구비하고 다니며 누가 뭐 있냐고 물어보면 짠 하고 꺼내어 뭐든 있는 사람인 양 잘난체 하는 것이 인생의 소소한 낙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쯤 되면 무겁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데, 그때는 필통이라는 물건에서 무게를 느끼지도 못할 만큼 건강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를 떠나고 필기구를 사용하는 학습과도 그닥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니 학용품을 잔뜩 챙겨 다니긴커녕 가방에 펜 한 자루만 있어도 다행이다 싶은 처지가 되었다. 애초에 긴 글을 손으로 쓸 일이 별로 없으니 다이어리를 쓰거나 잠깐 뭘 메모할 때가 아니면 펜이 사용되지 않아, 서랍 속에 십수 년 묵은 필기구가 목적을 잃은 고대 병기처럼 잔뜩 굴러다니는 형국이다. 

아마 이 속도라면 20년 뒤에도 비슷한 상황일 것 같다. 아니, 어디서 판촉물이나 사은품으로 주는 펜이 쌓이는 속도를 생각하면 필기구는 불어나기만 할 것 같다. 이대로라면 필기구 만드는 회사들도 난처해져서 손편지나 필기구를 주고받는 ‘레터 데이’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고, 저 바깥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이틀 만에 펜 한 자루씩 소모해가며 무시무시하게 많은 글자를 적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나저나 얼마 전에는 지워지는 펜이 필요해서 집 근처를 헤매였다. 나는 보드게임을 하면 언제 누구와 했는지 도서 대출 카드처럼 기록지를 만들어 보드게임 안에 넣어두는 습성이 있는데, 내용을 이것저것 적다 보면 틀리는 경우가 많아서 지워지는 펜으로 적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이 다이소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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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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