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일기

박선욱 · 시, 동화, 소설 및 평전을 씁니다.
2023/04/10
노숙일기
   
   
   
전기철
   
   
   
가난한 밤은 길다.
수녀들이 지나가고
신부들이 지나가고
골판지 박스가 오고
신문지들이 오고
차곡차곡 쌓인 하루 위에 몸을 누이면
잠 속으로 발자국이 찍히고
아직 밥을 먹지 못한 영혼이 휘파람 소리를 키우면
소주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욕설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밤은 저홀로 깊어가고
잠들지 못한 이들의 신발은
발레를 하듯 꺾이고 꺾인다. 눈을 감아도
잠은 달아나고 자꾸 알전구만 충혈되니
숫자를 세다가 그치고 그치는
밤은 정말, 천천히 걷는다.
파도 소리를 키운 잠 속
다리를 모아 지느러미를 만드니
몸 위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자국에서
가시가 돋는다.
방귀처럼 터지는 한밤
잘라온 옛 꿈속에 숨어도
아침은 영영 오지 않을 듯이
   
   
(전기철 시집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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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실천문학》 으로 등단.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눈물의 깊이》 《풍찬노숙》, 인물이야기 《윤이상》 《김득신》 《백석》 《백동수》 《황병기》 《나는 윤이상이다》 《나는 강감찬이다》 등. 《윤이상 평전: 거장의 귀환》으로 제3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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