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일까 : <우체국 아가씨>

구황작물
구황작물 · 실패가 일상인 비건 지향인
2024/04/16
나의 엄마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부친과 오빠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집안의 몰락을 경험했다. 결혼 후에는 한동안 여유로웠지만 또 한차례의 급격한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IMF가 터짐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고 월셋집을 전전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내가 겪은 가난은 수치와 열패감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겪은 가난은 좀 더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격표, 청구서, 고지서, 등록금, 노동, 노동, 노동. 그리고 따라오는 피로와 절망.

지친 엄마는 이런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차라리 전쟁이 나면 좋겠어. 그럼 다 같이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할 거 아냐. 차라리 그게 나아."

듣다 못해 "전쟁 나면 다 죽는 거라고! 우리만 살 것 같아?" 쏘아붙이면 엄마는 텅 빈 눈으로 말했다.
"응. 그래도 되니까. 다 쓸어 없어졌으면 좋겠어."

한두 번 듣는 게 아닌데도 매번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의 함의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은 뻗어가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한때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일까, 불운일까. 우리는 삶에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까.
<우체국 아가씨> 책표지 @빛소굴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우체국 아가씨>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마을, 크리스티네는 우체국에서 일한다. 직업이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녀는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소모품일 뿐이다. 십여 년간 이어진 전쟁은 그녀에게 젊음과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렸다. 삶은 그저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왕래가 없던 클라라 이모가 스위스의 고급 휴양지로 오라는 초대장을 보내온다. 크리스티네는 병든 엄마를 대신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여행을 떠난다.

도착한 그곳에는 부유함이 넘친다. 크리스티네는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금세 환희에 젖는다. 이모의 호의로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우아한 사람들과 함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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