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편식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3/26
사실의 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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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충 누구나 아는 단어이지만 ‘보도연맹’이라는 단어는 수십 년 동안 금기였고, 입밖에 내서도, 알려고 해서도 안되는 흉물이었다. 북괴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마르고 닳도록 배웠지만 한국 정부가, 스스로 한때의 좌익을 보도(保導), 즉 지켜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겠다고 조직한 단체의 구성원들을 자신의 조직과 힘으로 말살시키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묻혀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그 서슬에 희생된 사람들조차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 후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의 가족들의 동태까지도 파악하고 있었으니 섣불리 얘기해 봐야 제 목숨 단축하거나 인생 망가질 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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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 점차 이 참혹한 학살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요즘 대통령 식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꼭 당시 군부 정권이나 그 후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조차 수십 만 민간인의 목숨이 흑마술의 희생자처럼 간단하게 사라진, 어찌 보면 나치보다 더한 (나치도 동족을 이렇게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사실을 수용하기 버거워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 편이 그럴 리가 없어.”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증거를 들이대면 회피 기동을 하며  논지를 바꾼다.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그리고 이 단계를 넘어서면 또 다른 사실을 재구성한다. “그렇게라도 안했으면 빨갱이 세상 됐어 임마. 저놈들이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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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른바 ‘진보’ 쪽도 만만치않게 심했다. 6.25 때 이야기를 꺼냈으니 6.25때 이야기로 되받자면, 학계에서는 이미 사장돼 버린 ‘남침 유도설’ 내지 북침설을 들 수 있겠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방한하면서 6.25 개전 이전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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