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설국雪國

이강제
이강제 · 도시계획전문가
2024/01/12
비 내리는 설국雪國
1.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대목처럼 ‘공항을 빠져나오니 온 시가지가 폭설에 뒤덮여 있었다.......’ 이런 광경을 꿈꾼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을 빠져나오니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와 안긴다. 며칠 전 눈 폭탄이 내렸다고 했지만 날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했다. 사실 가와바다의 ‘설국’은 삿포로가 아니라 일본 중서부에 위치한 니카타의 유자와湯澤 온천이 그 무대다.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질 때 노천온천에서 즐기는 목욕. 그게 백미다. 니카타는 삿포로에서 한참 아래쪽인 혼슈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니카타가 서울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곳인데 비해 북해도의 삿포로는 블라디보스톡과 위도가 비슷할 정도로 북쪽의 한대지방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근하다니.
소설에서 가와바다가 ‘국경’이라 말한 것은 섬나라 일본이 그때까지만 해도 수없이 많은 다이묘의 영토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우리야말로 국경을 넘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빠져나와 북해도에 왔지만 설국은 없었다. 공항 근처 골프장 잔디밭의 녹색이 싱그럽기까지 했다.
설국의 주인공은 돈 많은 놈팡이다. 금수저로 태어난 덕분에 무위도식하며 여행이나 즐기는 팔자 좋은 남자다. 게이샤인 고마코는 그를 보자마자 대책 없이 좋아한다. 그러나 놈팡이 시마무라는 그녀에게서 순수한 호감을 느끼지만 가볍게 엔조이하는 대상으로 그녀를 대하고 싶지 않다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다. 좋은데 쉽게 일회성으로 좋아하고 끝내고 싶지는 않다는 감정이다. 그렇다고 게이샤하고 백년가약을 맺을 수는 없다는 생각도 있었을테고.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 번을 만나지만, 손님과 접대부의 관계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로 끝나버린다. 그냥 허무하다. 온 세상을 마법의 나라로 만드는 흰 눈이 녹아 질척이는 진창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단언컨대 소설 자체는 별 재미가 없다. 이런 소설로 어찌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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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진주>, 문학사상사, 2019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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