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고무시키는 문장
2023/01/23
모든 자기소개서의 시작을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의 첫 단락 속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대문호가 쓴 믿음직한 소설을 빌려와 시작하면 일단 기세가 남달라 보일 것 같았고 어딘가 번듯한 인상을 줄 것 같았다. 또한 도저히 자신에 대해 쓸 때 어떤 말로 말문을 떼야할지 모를 막막함이 해소 되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일의 어색함을 중화시켜줄 것 같았다. 기출 변형처럼 그 문장을 다시 소환하자면 내용은 이렇다.
“별 부끄러움 없이 자신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주 민망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글과는 그 집필 목적이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미성년』,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이상룡 옮김, 11p.
나는 이 마법의 문단을 온갖 기업의 자기소개서가 요구하는 분량에 따라 맞춰서 인용했다. 몇 천자를 요구하는 기업에는 저 단락을 통째로 갖다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며 말문을 뗐고 요구하는 분량이 적을 때에는 단락 속 첫 구절만 인용했다. 정작 지금 누군가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죄와 벌』과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모두 섞어 이야기해버릴 만큼 희미한데도 첫 문장만큼은 주기도문처럼 욀 수 있다. 저 문장을 빌려오지 않으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민망함과 어색함을, 그리고 자신에 대해 설명하며 도취된 스스로를 변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꿔 말하자면 대문호의 문장을 빌어 포문을 여는 기세와 약간의 겸양을 동시에 갖춘 척 하고 약간 거리를 둔 척 하고나면 내게 마음껏 도취돼 잘도 떠들어도 그게 꼴 사납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요구된 ‘자기소개’ 라는 항목을 분량만큼 순순히 채워나갈 수 있는 동력이 필요했다. 그 문장을 통해 고무되지 않으면, 겸손한 척 뻔뻔하게 자기 이야길 할 수 없었고, 동시에 그 문장을 통해 고무되지 않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