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의 재발견과 인문학적 사고의 힘

전업교양인
전업교양인 · 생계를 전폐하고 전업으로 교양에 힘씀
2024/04/03
수사학(rhetoric)은 오래된, 그렇지만 잊힌 전통이다.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사람(rhetor)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이 말은 웅변술과 변론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문명에서건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건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의 수가 중요해지는 정치 체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들을 설득하는 기예가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유서 깊은 학문이 왜 잊힌 전통이라고 말했을까. 한편에는 수사학을 '말을 꾸미는 기법'으로 축소시킨 문예이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설득력은 있지만 타당하지 않은 논변의 형식을 오류론에서 다루는 논리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변론술로서의 수사학은 그 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인문학은 이 수사학을 재발견해낸다. 바로 담론의 정치학으로서. 

설득은 논증이나 입증과는 다르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 다르다는 건 19세기의 중요한 논쟁이었고 현대 철학(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기원이 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납득이나 설득이 증거와 결론의 관계가 아니고 심리적인 동의의 문제라는 것에서 출발해보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수십 년 전이라면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장면 하나를 상상해 보자. 종이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이 옆 자리에 있다. 흘낏 신문을 쳐다보니 그 눈길을 알아챈 옆사람이 "에휴"하며 한숨을 쉬며 신문을 내게 건낸다.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이건 수십 년 전 우리의 일상과 심성에 대한 민속지적 기술이기도 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것을 흘낏 쳐다보는 일(그런 것이 금기시되거나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서), 낯선 타인에 대한 환대의 표시로 신문을 공유하는 일(그렇게 훔쳐볼 거면 그냥 네가 읽으라는 식의 공격적 반응이 아니라), 그리고 상대가 사소하게 자신의 영역을 넘어오는 것(어깨너머로 신문을 읽는 일)이 말을 걸어도 된다는 허용을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나라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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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건 무엇인지 고민하다 자기 한 몸 추스리는 법을 잊어버린 가상의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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