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폐(Iron Lung)'를 기억하라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3/04
대통령의 의회연설
사내는 힘겹게 일어났다. 그조차 정확히 표현하면 일어선 것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하는 평범한 동작에 해당하겠으나 사내에게는 힘을 모아 끙끙여야하는 작업이었다. 다만 아직 진짜 힘든 과정이 남아있었다. 평소라면 수행원의 도움을 얻어 휠체어에 오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식적인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내각요인, 그들의 보좌관과 수행원 그리고 기자로 가득한 의사당에서 연설해야 했다. 의사당에서도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마지막 순간, 대통령의 자리에서 연단에 이르는 짧은 거리는 스스로 걸어야했다. 또, 연설 내내 자신의 다리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무척 가혹한 일이라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의 의무였다. 정치인이 된 무렵부터,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 온전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의무였다. 그가 몇 걸음도 걷지 못하면, 연설하는 짧은 시간도 자신의 다리로 몸을 버티지 못하면, 유권자는 불안해하고 정적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그날은 단순히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몇 걸음도 걷지 못하면, 연설하는 짧은 시간도 서있지 못하면, 전체 국민이 두려워할 것이 틀림없었다. 정적들조차 낙담할 것이다. 반면에 태평양 건너의 사악한 무리, 예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한 악당들은 한층 큰 기쁨을 느끼며 황홀해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사내는 걸을 수 있었다. 의회에서 연설하는 짧은 시간은 스스로 지탱할 수 있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속임수다. 금속으로 만든 튼튼한 보조기와 오랜 훈련을 통해 몇 걸음 정도는 마치 걷는 것처럼 행동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연설하는 짧은 시간은 연단을 붙잡고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럴려면 보조기가 필요했다. 보조기를 드러나지 않게 착용하는 것에는 긴 시간과 적지않은 고통이 따랐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감당할 의무에 해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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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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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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