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와줘, 내가 당신의 열두번째 아내가 될게 -연재소설 <황혼의 불시착> 8회

오진영
오진영 · 작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2023/10/21
9회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사람, 안전하고 진부한 섹스를 할 일은 더더욱 없는 상대인 남자에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카톡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같은 정치 덕후들이 나눌만한 나라와 민족의 미래 걱정 얘기를 해봤다. 
그냥 심심해서 당신이랑 이바구 좀 하고 싶어서요, 라는 식의 화제도 꺼내봤다. 
그러다 미친 척하고, 썸타는 남녀 사이에서 오갈 법한 화법을 구사해보기도 했다.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여자는 남자에게 말을 걸어봤다. 

방 안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던 그 날밤의 모임에서 홀로 도드라지게 잘 생긴 젊은 남자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남자는 여자가 물어보는 말에 최소한의 어휘를 구사해 대답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대답할 때
서울 다산 콜센터 직원 만큼의 다정함도 담지 않았다. 
남자는, ‘누님이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니 영광이네요’ 정도의 인사 치레도 하는 법이 없었다.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되 여자가 독백처럼 건네는 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도 어떤 날은 서너시간 걸려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지나서 대답하기도 했다.

여자는 생각했다. 
니가 이렇게까지 철벽을 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다구!

14살 많은 여자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남녀 사이의 로맨스라는 것을 명확히 알아차린 남자는, 
이럴 때 빌미를 주는 것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오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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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오진영tv 유튜브로 시사 평론을 쓰는 칼럼니스트. 포르투갈어권 문학 번역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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