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방문> : 슬픔의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에 관하여

신승아
신승아 · 삐딱하고 멜랑콜리한 지구별 시민
2024/02/09

박경리 작가는 1994년 10월 <토지> 완간 기념 인터뷰에서 당신의 글쓰기 철학을 술회했다. “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읽기라고 다를까. 내 삶이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면 책은 읽지 않았을 것이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시련의 파도와 고만고만한 불행들. 때로는 힘껏 노를 저으며 물살을 가로질렀지만, 어느 날은 갑작스러운 풍랑에 휩쓸려 돛단배가 뒤집히곤 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같은 삶. 나는 매일 일기 예보를 확인하며 외출 준비를 하듯, 하얀 종이에 일정한 규격으로 새겨진 활자들에 기대어 하루를 살았고, 고난에 맞섰다.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세계를 만나는 것이 두렵고, 괴롭고, 가끔 즐거웠다. '원인 불명'이라 이름 붙인 고통을 해석하기 위해 부지런히 언어를 찾아 헤맸다. 문장과 행간 사이에는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가시화되어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순간, 나만 억울하다고 통곡했던 날들이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편견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막이 깨질 때마다 탈화했고, 슬픔이 머문 자리마다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아직까지 고통을 설명할 명확한 언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상이 성가시다며 구석진 자리로 밀어낸 몸들이 하나, 둘 나의 세계로 초대될 때마다 사랑이 충만해진 것은 덤이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삶에 빚지며, 책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도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가 기자 출신이라는 것에 거리감을 느꼈다. 4년제 대학 출신 엘리트 여성이 말하는 슬픔은 언제나 고졸 출신 지방 여성인 나의 슬픔에 와닿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읽기도 전에 상처받지 않을까 미리 걱정했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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